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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기억속에 아빠..엄마..

그리고 나의 어린시절,

by 제이쌤

글쓰기 동지가 생겼다. 독서모임에서 글쓰기 모임으로 이어진 글쓰기 동지가 생겨서 참 좋다.


내가 글을 쓰는 첫 번째 이유는 나를 찾기 위해서다. 나는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종종 글 속에 잘 기억나지 않는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과 '나에 대한 무지'를 연결하지 못했다.


오늘 글쓰기 동지들에게 나의 엄마, 나의 부모님에 대해 글을 써보자 제안했다. 나조차 어떤 글을 쓸 수 있을지 막막했으나, 이론적으로 '나'를 알기 위해서는 응당 내 근본인 부모님과 함께한 어린 시절을 알아야 하기에 제안해 놓고, 막상 나도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다.


엄마에 대해서 써보려다가, 아빠.. 아버지.. 가 생각이 났다. 나는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말로 얼마나 해본 적이 있었나 생각하다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빠에 대해 세줄 때쯤 써 내려가다 포기했다. 나는 아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다만, 53년에 태어난 우리 아빠는 6.25 전쟁이 휴전으로 끝이 날 때쯤 태어나셨겠구나. 모든 것이 황폐화되고 엉망이던 그 시절에 배고프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셨겠구나 짐작을 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말고, 두 번째 부인의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면 그런 외로운 어머니에, 3남 1녀 중 장남으로 늘 어깨가 무거웠으리라 짐작된다.


그럼 엄마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는 외할머니를 뵌 적이 없다.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잘 모른다. 그냥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만 들었다. 작은 이모와 큰 이모는 우 씨인데, 우리 엄마와 외삼촌은 김 씨다. 아버지가 다르다 하셨다. 전쟁과 피난통에 죽고 살아남은 자들끼리 다시 살림을 꾸리기도 했으며, 그 사이에 평온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어렴풋이 들었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엄마 노릇이 미숙하기가 말할 수가 없는데, 우리 엄마 아빠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부모 노릇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본인들도 잘 알지 못했을 '자존감'이나 '행복' 따위를 얼마나 자식에게 알려줄 수 있었을까. 연고 없이 상경하여 자식만은 잘 배우게 하겠다고, 그 고된 삶을 살아내느라 매일매일이 힘겨웠을 것이다. 그러니 엄마 아빠의 웃는 얼굴, 행복한 모습이 그리 내 기억 속에 많지 않은 것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지도 모른다.


나의 방어기제는 '회피'와 '왜곡'이라는 것까지는 알아냈으나 어린 시절을 그렇게 왜곡하고 미화시키고 있는 줄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런걸 인지장애라고 했던가.


내가 한동안 그렇게도.. 있을 수 없는 '완벽한 가정'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 나의 결핍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희생적이고 따뜻했다고 미화했던 엄마는 평생 시어머니를 모시고, 삶의 무게를 잔뜩 짊어진 남편과, 종갓집 장손며느리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죄책감등을 이고 지고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살아내야 했던.. 따뜻하기보다 그저 살아낸 좀 무심한 엄마였던 거 같다. 기억해 내려 애쓰지 않았던 아빠는 책임감 있으셨으나 내게 정서적 버팀목으로써의 아빠는 아니었음을 기억의 장막을 한풀 걷어내고 나니 조금 보인다.


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의 전형이다. 누가 강요했는지 모르겠으나, 장손집에 맏딸로 태어났고, 여동생만 하나 있었기에 우리 집은 늘 갖지 못한 아들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로 태어났어야 한다는 내 동생은 악에 받쳐 공부를 죽도록 해냈다. 없는 살림에 눈 딱 감고 이런저런 지원도 요구했으며, 그렇게 내로라하는 대학 입학 후부터 정말 힘닿는 대로 그 마음의 빚을 갚아나갔다.


나는 달랐다. 그럴 수 없었다. 중학교 때 점점 오르는 성적이 한편으로 두려웠다. 나는 영어도 국어도 사회, 역사도 잘했다. 중국어도 빠르게 배웠다. 그래서 외고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성적이 자꾸 오르니, 내가 덜컥 외고에 합격이라도 할 만큼 잘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역시나 나의 방어기제는 회피였다. 거기까지만 하자. 더는 가지 말자.


그렇게 거기까지, 거기까지만.. 그게 내 인생이 되어버렸다. 폐를 끼칠까 두려웠던 마음의 시작이 그냥 거기까지만 하지 뭐.. 그런 삶의 태도로 자리 잡아 버렸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안 될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던 내 마음이 소리를 낼까 봐 자꾸만 마음의 소리를 외면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내 인생에 중요한 결정 앞에서도 늘 내 마음은 뒷전이었고, '남'이 더 중요해져 버렸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춘기의 방황은 그런 고민으로 시작했어야 했는데, 사춘기 역시 회피로 보내버렸다. 그래서 이제서 이렇게 길고 지루한 사춘기를 앓는다.


내 부모님은 내게 자신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 적이 거의 없다. 아마 일부로 그랬다기보다는 그분들도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자식에게도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 기억을 가지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내 부모님도, 나의 어린 시절도 나 좋을 대로 모두 미화하고 만들어놓은 기억 속에 살아온 거다.


나는 사랑받으며 평온 속에 자랐다 생각했으나 내게도 부모님 사랑에 대한 결핍이 있었던 거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편의 애정결핍이 어디에서 왔는지만 생각하고,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위한 억의 미화.


아빠는 늘 엄하셨고, 늘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으나 챙겨야 할 가족, 친척이 너무 많아 버거워했고 그래서 늘 무거워 보였다. 또, 우리를 데리고 어딘가 갈 때는 늘 먼저 나가 차에 히터나 에어컨을 틀어 놓고 기다리는 아빠이기도 했다. 는 그런 아빠와 사춘기가 되면서 아예 말을 하지 않았고 계속 피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집 앞에 찾아와서 날 기다렸던 남자사람친구랑 같이 서 있던 모습을 아빠에게 들켰던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등짝을 후드려 맞았던 기억. 내가 하고 싶다던 노래서클활동은 말도 못 꺼내게 반대했던 기억. 온통 그런 기억들 뿐이다.


그런 아빠가 동생 결혼식장에서 많이 우셨다. 결혼식장이었는지 결혼식 전날이었다고 들은 건지도 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가정 안에서 요구하고 또 그 은혜를 갚아나가며 살아낸 동생과 달리 나는 늘 한 발 물러서 있었다.


지금 아빠는 그 엄했던 모습이 아니다. 책임감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시고는 많이 약해지셨다. 할머니를 거동을 못하게 되실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모시다가 얼마 전에 거동이 힘들어지셔서 요양병원으로 모시면서 아빠는 자주 우신다고 한다.


엄마는 불평불만 없이 평생 시어머니를 모셨으나, 따뜻했던 적도 없이 도리를 해내시고, 할머니가 떠나고 우는 아빠를 보며 화를 내신다.


그들의 삶에서 늘 약간은 방관자처럼 한 발 떨어져 지냈던 나는 이제야 그분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게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는 걸 알고 난 다음이라니.


나도 참 알고 보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만 뒤집어쓴,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런 글에는 엄마 아빠께 감사한다는 말로 글을 맺어야만 할 거 같다는..

정말 콤플렉스 덩어리......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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