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
1948년 봄, 제주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마당 가득 내리쬔 햇살이 조금씩 사라지며, 장독대와 우물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난다. 하린은 빨랫줄에 걸린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젖은 수건을 힘주어 짜던 손을 멈춘다. 바람이 갑자기 멎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가 또렷하게 귀에 들어온다.
쿵, 쿵, 쿵.
처음엔 나무꾼이 내려오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규칙적인 울림은 곧 땅바닥을 두드리며 가슴속까지 파고든다. 하린은 숨을 고르며 귀를 기울인다. 발소리는 점점 커지고, 더욱 분명해진다.
골목 저편, 어스름 속에서 그림자들이 움직인다. 순간, 하린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어깨에 총을 걸친 채 줄지어 걸어온다. 까만 모자, 굳게 다문 입술, 좌우를 번갈아 훑는 차가운 눈빛.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돌길이 더 크게 울린다.
하린은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뛰어가려 한다. 하지만 두 발은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심장은 가슴에서 튀어나올 듯 뛰는데, 눈앞 풍경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장독대 위의 햇살은 이미 지워졌고, 저녁 바람이 옷자락을 스친다. 그 바람 속에 군홧발 소리가 섞여 서늘하게 울린다.
“하린아!”
부엌에서 어멍의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어멍은 허둥지둥 창문을 닫고, 방문을 밀어 잠그며 말한다.
“지금은 절대 밖을 보지 마라.”
하린은 떨리는 손으로 문턱을 붙잡는다. 하지만 이미 눈에 새겨진 장면은 지워지지 않는다. 총부리를 어깨에 메고 묵묵히 걸어오던 군인들, 무겁게 떨어지던 발자국, 그리고 길게 드리운 그림자.
집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할망은 기도를 하듯 손을 모으고, 아버지는 방 안에서 말없이 앉아 있다.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고, 숨조차 크게 쉬지 않는다.
쿵, 쿵.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바로 집 앞까지 다가온 것만 같다. 하린은 귀를 막고 싶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귀를 막는 순간조차 무섭다. 어둠이 골목을 삼키며, 발자국만이 살아 있는 생명처럼 울려 퍼진다.
하린은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빛 한 줄기를 본다. 곧 그림자에 가려진다. 집 앞을 스쳐 지나간 군인의 발걸음일까. 작은 몸이 얼어붙듯 숨을 죽인다. 작은 소리 하나라도 들리면, 그 무리들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칠 것만 같다.
시간이 멈춘 듯 흐른다. 짧은 순간이지만, 하린에게는 하루보다 길게 느껴진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집 안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하린은 깨닫는다. 평범한 하루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침묵은 오래도록 이어질 불길한 예고처럼 하린이의 어린 마음에 깊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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