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사라진 자리

제주 5

by Bloom지연

1948년 봄, 제주


밤이 길게 늘어진다. 바람이 산비탈을 훑고 내려와 돌담을 스친다.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던 작은 등불들이 하나둘 꺼진다. 아이들은 이불속에서 숨을 죽이고, 어른들은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더한다. 멀리서 짧은소리가 하늘을 찢고, 별빛이 잠깐 흔들린다. 누구도 크게 숨을 쉬지 않는다. 숨이 커지면 기척이 되고, 기척이 발각이 될까 두려움이 모두의 입술을 봉한다.


새벽이 오고도 마을은 깨어나지 않는다. 아궁이 연기가 오르지 않는다. 닭도 울지 않는다. 빈 마당 위에 바람만 자갈을 구르고 지나간다. 골목 어귀, 짚신 한 짝이 먼지에 반쯤 잠긴 채 남아 있다. 그 옆에 작게 끌려간 흔적이 이어지고, 그 끝은 뚝 끊긴다. 아이 하나가 그 신발을 내려다보다가, 어른의 손이 어깨를 끌어당기자 고개를 떨군다.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는다. 묻지 않아도 빈자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 아침, 마을은 어제와 다른 모양으로 서 있다.


몇 집은 문이 열리지 않는다. 부엌 상 위에 국그릇이 식은 채로 남아 있고, 못에 걸린 저고리는 주인의 체온을 잃은 채 매달려 있다. 방 안 공기에서 사람 냄새가 천천히 빠져나간다. 어른들은 문턱 앞에서 한 걸음 더 가지 못하고, 아이들은 빈 방을 오래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인다. 사라진 자리만 남는다. 자리가 먼저 말을 걸고, 사람은 그다음에야 사라졌다는 사실을 겨우 따라간다.


낮이 되자, 사람들은 보자기를 펼친다. 옷을 몇 벌, 마른 고구마를 몇 알, 물병 하나, 작은 손을 감싸 쥘 힘을 넣는다. 집이 등을 미는 듯, 모두 산 쪽으로 몸을 돌린다. 돌담을 돌아 나오면 바람이 더 차갑다. 산길 입구에서 발걸음이 망설임을 밟고, 그 위에 또 다른 발걸음이 겹쳐진다. 제주에는 굴이 많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마지막 숨을 모으던 곳들, 바위틈과 동굴, 숲의 어둠이 겹겹이 쌓인 깊은 곳들. 오늘도 그곳들이 사람들의 어깨를 받아들인다.


산을 오르는 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너무 커 보인다. 어른들이 아이의 입을 부드럽게 막는다. 갓난아기의 울음이 목울대에서 맴돌다 다시 안으로 삼켜진다. 울음이 바람을 타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두가 안다. 다독이는 손길이 떨리고, 떨림이 또 다른 떨림을 부른다.

“조금만 더 가자.”

말은 입술 사이에서 가만히 생기고, 곧 사라진다. 말조차 소리가 되는 이 숲에서, 위로는 입모양으로만 전해진다.


총성이 한 번 더 난다. 모두가 땅에 몸을 붙인다. 흙냄새가 코를 가득 채운다. 숨이 얕아진다. 하늘로 새떼가 튀어 오르고, 검은 원이 숲 위를 크게 그린다.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원이 천천히 풀리고, 날갯짓 소리가 멀어진다. 그제야 사람들은 흙에서 떨어져 일어난다. 어른 한 명이 손등으로 진흙을 닦고, 다른 어른이 그 손을 잡는다. 잡힌 손에서 체온이 서로를 확인한다. 확인하는 동안에도 발소리는 최대한 작게, 흙 위를 미끄러지듯 이어진다.


굴 속 공기가 눅진하다. 이끼 냄새가 가슴속으로 내려간다. 바닥의 젖은 흙이 발바닥을 훑고, 어둠이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을 하나씩 베껴 마신다. 작은 불빛이 잠깐 켜졌다 꺼진다. 얼굴들이 불빛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불은 위험과 위안을 동시에 데려온다. 어른들이 불을 감싸고, 감싼 손에서 그림자가 흔들린다. '조금만.' 말이 다시 입모양으로만 만든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임만으로도 약속이 된다.


날들이 이어진다. 굴 입구에 귀를 대고 바깥을 듣는 시간이 길어진다. 바람 소리,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모르는 발소리, 안 들려야 할 말소리. 어른들은 소리의 질감으로 거리를 가늠한다. 가까워지는지 멀어지는지, 머무는지 지나가는지. 소리의 모양을 손바닥에 그려 보이고, 그 손바닥을 다시 접는다. 소리가 사라지는 동안, 사람들의 입술은 더 얇아진다. 말이 줄어들수록 눈빛이 길어진다.


마을로 내려가 본 사람의 이야기가 어둠 속에서 돈다. 담장이 그을리고, 지붕이 내려앉고, 우물가의 동아줄이 타 있다. 신발 한 짝, 작은 그릇, 어린 공책 한 권이 바람에 눕고 일어난다. 공책 표지가 그을음으로 검게 변하고, 모서리가 젖는다. 그 공책 안쪽에 삐뚤게 적힌 이름 하나가 있다. 이름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가 끝나고도 아무도 먼저 말을 잇지 않는다. 모두가 같은 곳을 보고 있는 듯, 어둠 속에서 같은 방향으로 잠시 고개가 기울어진다.


어느 밤, 아이가 꿈을 꾼다. 마당에서 뛰어놀던 발소리가 꿈 안에서 작게 울린다.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던 손이 반짝인다. 언니의 손이 아이의 손을 잡고, 두 손이 같은 노랫말을 더듬는다. 아이는 꿈속에서 그 노래를 이어가려 하지만,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고, 파도가 말을 삼킨다. 아이는 잠에서 깨어난다. 깨어나서도 한동안 노랫말의 빈칸을 바라본다. 빈칸이 커진다. 커진 빈칸이 가슴 안쪽에서 둔하게 울린다.


어른 하나가 굴 입구에서 밤하늘을 바라본다. 별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불빛이 꺼진 마을 위로,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아진다. 그 어른은 돌에 몸을 기대고 서서 잠깐 눈을 감는다. 눈꺼풀 뒤에 낮의 흔적들이 흘러간다. 문턱에 걸린 작은 천, 서랍 위에 뒤집힌 숟가락, 마룻바닥에 떨어진 머리끈, 빈 빨랫줄. 어른은 그 장면들을 하나씩 세고, 셈이 끝나지 않음을 안다.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음을 안다. 그래도 다시 눈을 뜬다. 눈을 뜬다는 일 하나가 오늘의 일과가 된다.


아이들은 굴 속에서 규칙을 만든다. 속삭임으로만 이야기한다.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는 손등을 톡톡 친다. 울고 싶을 때는 무릎을 끌어안고 세어 본다. 열까지 세어도 울음이 그치지 않으면, 옆 사람이 함께 세어 준다. 열둘, 열셋, 열넷. 숫자가 길어질수록 울음은 조용해진다. 누군가 숫자를 기억하고, 누군가 숫자를 잊는다. 잊힌 숫자가 슬픔을 덜어 주고, 기억된 숫자가 서로를 부른다.


또 다른 밤, 숲 아래에서 희미한 불빛이 요만큼 뜬다. 얼굴들이 고단한 내음을 풍기며 모인다. 불빛이 손바닥을 건너 다니고, 손바닥의 선들이 또렷해진다. 한 어른이 천천히 무릎을 굽힌다. 작은 천을 펼쳐 무엇인가를 감싼다. 모두가 안다. 말이 먼저 가 닿지 않아도, 천이 무엇을 감싸는지 안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군가는 하늘을 본다. 불빛이 잠깐 크게 흔들리고, 바로 작아진다.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이 불고서도 잠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 잠시가 길어지고, 길어진 잠시가 모두의 목젖에 걸린다. 그 순간, 죽음이라는 말이 소리로 나오지 못하고 각자의 가슴에서 무게로만 눌러앉는다. 무게가 오늘의 날짜가 된다. 날짜가 남는다.


다음 날, 더 많은 발걸음이 산으로 향한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뚜렷하지 않아도, 여기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마음이 길을 만든다. 길은 처음부터 있던 것처럼 사람들의 발아래 생긴다. 아이는 내려가고 싶다고 한 번 묻지 않는다. 묻지 않아도 어른의 손이 더 꽉 잡힌다. 손을 꽉 잡는 힘이 말 대신이 된다. 그 힘은 “지금은 가지 못한다”는 뜻이 되고, “그래도 언젠가는”이라는 뜻이 된다. 두 뜻이 같은 손 안에서 흔들린다.


굴 안에서 누군가가 노랫말의 앞 구절을 입모양으로 만든다. 다른 누군가가 뒷구절을 이어 가려다 멈춘다. 반쯤 만들어진 노래가 어둠 속에 걸린다. 걸린 노래가 성대에 작은 떨림을 남긴다. 그 떨림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고, 살아 있다는 증거가 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밀려온다. 모두가 그 순간을 견딘다. 견딘다는 말이 오늘의 두 번째 일과가 된다.


저녁이 내리고, 산그늘이 더 길어진다. 굴 입구 바깥에서 바람 방향이 바뀐다. 바람이 냄새를 실어 나른다. 흙, 그을음, 젖은 풀, 오래된 피 냄새가 아닌 무엇, 설명되지 않는 냄새. 코끝이 먼저 알아채고, 가슴이 그다음을 안다. 어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이 필요 없는 냄새가 있다. 그 냄새가 여기까지 올라온다. 모두가 더 깊숙이 몸을 당긴다. 좁은 공간이 더 좁아진다. 좁아진 공간에서 서로의 체온이 더 가까워진다. 가까워진 체온이 서로를 붙잡는다.


밤이 다시 길어진다. 오늘 밤의 어둠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과도 다르다. 어둠은 조금씩 더 무거워진다. 무거워지는 만큼, 사람들의 눈동자는 더 느리게 움직인다. 느려진 눈동자가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는 것이 두렵다. 두려움이 심장 속에서 일정한 박자를 만든다. 그 박자에 맞춰 숨이 드나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이름들이 떠오르고, 내쉴 때마다 사라진다. 떠오르는 이름과 사라지는 이름이 밤을 메운다.


누군가 조용히 속삭인다. “기다린다.” 다른 누군가가 가만히 대답한다. “기억한다.” 말 두 개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더듬어 만난다. 만난 말이 작게 불빛이 된다. 불빛이 다시 꺼진다. 꺼진 뒤에도 불의 잔상 같은 것이 눈 안쪽에 남는다. 그 잔상이 길을 만든다. 오늘 밤은 잔상을 따라 눈을 감는다. 내일 아침은 잔상을 따라 눈을 뜬다.


아침이 와도 닭은 울지 않는다. 아궁이 연기도 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굴 속 사람들은 일어난다. 일어난다는 일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일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은 오늘이다. 오늘이 또 시작한다. 시작하는 오늘 안에서, 사람들은 사라진 자리를 다시 바라본다. 자리가 비어 있는 동안, 기억은 채워진다. 채워진 기억이 서로의 손을 붙잡는다. 손을 붙잡은 채, 사람들은 산의 심장을 향해 더 깊이 걸어 들어간다. 걸어 들어가면서도, 언제든 돌아볼 수 있게 마음의 문턱 하나를 낮게 남겨 둔다. 그 문턱을 넘어오는 소리를 언젠가 다시 듣는다는 희망을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가슴속에 감춰 둔다.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오늘을 잇는다.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오늘 속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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