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무너지는 침묵

제주 6

by Bloom지연

1948년 봄, 제주


돌산 깊은 골짜기, 사람의 발자국조차 드물던 곳에 작은 동굴 하나가 숨어 있다. 입구는 잡풀과 돌무더기로 가려져 있어 얼핏 보면 짐승의 굴처럼 보인다. 그곳이 지금 하린이 가족이 몸을 의탁한 은신처다.


동굴 안은 낮에도 어둡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져 바닥의 돌을 적시고, 바람은 바깥 냄새를 싣고 들어온다. 비릿한 흙내와 눅눅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불씨라도 지펴 따뜻함을 얻고 싶지만, 연기가 새어 나가면 곧 들킬 터다. 그들은 차가운 돌바닥에 마른풀과 겉옷을 겹쳐 깔고 그 위에 몸을 붙인다.


하린은 무릎을 끌어안고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서 언니 수미의 얼굴이 떠오른다. 골목 끝에서 기다리던 모습, 함께 장독대 위에 앉아 별을 세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언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배고프지는 않을까. 무섭지는 않을까.’


동생 은지도 생각난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툭툭 털며 뛰어다니던 모습, 손에 쥐여 주던 달콤한 엿조각의 맛까지 선명하다. 그때는 너무 흔하고 평범했던 일상이 지금은 꿈처럼 멀리 있다.

‘은지는 뭐 하고 있을까. 혹시 우리처럼 숨어 있는 건 아닐까.’


하린은 목이 메어 말도 꺼내지 못한다. 동생이 있었다면 작은 손을 잡고 버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하린에게는 기댈 동생이 없다. 언니도 곁에 없다. 가슴 한쪽이 허전해지며 눈물이 고인다. 울음소리조차 낼 수 없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다.


멀리서 총성이 간간이 울린다. 짐승 울음 같은 소리와 사람의 비명 소리가 구분되지 않는다. 어린 가슴이 쿵쿵 뛴다. 어른들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고, 숨조차 내쉬기 힘들 만큼 공기가 무겁다.


며칠째 굶주림이 이어진다. 보리죽 한 그릇도 없다. 아침저녁 산새 소리만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멍은 언제나처럼 하린이를 팔로 감싸 안고, 할멍은 떨리는 손으로 작은 돌멩이를 쥐며 기도를 중얼거린다. 하린은 아빠의 어깨를 힐끗 바라본다. 아빠는 몸이 잔뜩 긴장된 활줄처럼 굳어 있다.


“이렇게만 있다가는…”

아빠의 목소리가 낮게 새어 나온다.

어멍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막는다.

“쉿. 누가 들으면…”

그러나 아빠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굶주린 가족의 얼굴이 그를 괴롭힌다.


낮에는 적들이 산을 뒤지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항복을 권유한다. 엄마는 하린을 끌어안고 귀를 막아준다. 그러나 아빠는 주먹을 움켜쥔 채 몸을 떤다.


“그놈들 말대로 나가면, 우릴 살려줄까?”

할멍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런 약속 믿지 마오. 나가면 바로 끌려가 죽을 게 뻔해.”

아빠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대신 주먹이 바위에 닿아 툭, 소리를 낸다.


비가 내리는 밤, 동굴 벽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바닥은 더 축축해지고 하린의 몸은 파르르 떨린다. 엄마는 젖은 치마폭으로 하린의 작은 몸을 감싸지만 따뜻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여보, 안 되겠어.”

마침내 아빠가 몸을 일으킨다. 어멍이 놀란 눈으로 그를 붙잡는다.

“나가지 마요. 제발. 조금만 더 버텨요.”

“버티다 굶어 죽을 순 없어.”


하린은 숨을 죽인다. 아빠의 굳은 얼굴, 그 입술에 맺힌 절망을 어린 눈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동굴 입구로 다가간다. 억센 손으로 바위들을 밀어내자 찬 공기가 몰려든다. 어둠 속에서 비 냄새와 흙냄새가 한꺼번에 들이친다.


“아버지…”

하린의 목소리가 떨린다.

아버지는 잠시 뒤돌아본다. 그의 눈빛은 단호하지만, 애써 미소를 담으려는 듯 흔들린다.

“잠깐 다녀오마. 곧 돌아오마.”


그 말은 동굴 안의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어멍은 울먹이며 그를 붙잡지만, 아빠는 결국 손을 뿌리치고 어둠 속으로 나선다. 비에 젖은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는 점점 멀어지다 이내 사라진다.


동굴 안에는 무겁고 긴 침묵이 내려앉는다. 남은 가족의 눈동자가 떨리고, 어른들의 숨결은 얇아진다. 멀리서 또다시 총성이 울린다. 하린은 어멍의 품 속에서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알 수 없는 예감이 소리 없이 고개를 든다. 아버지가 나갔던 입구 쪽은 여전히 적막하다. 돌아온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 아버지의 빈자리가 동굴 안을 더 춥게 만든다.


하린은 무릎을 끌어안고 눈을 감는다. 불현듯 마음을 꽉 조여오는 그리움이 있다. 집 마루 밑에 숨겨 두었던 초록 유리 조각.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던 그 빛, 마음을 달래주던 유일한 보물. 급히 산으로 피하느라 그것을 챙기지 못했다.


‘그 유리만 만지면, 아버지도 … 금방 다시 오고, 괜찮아질 것 같아.’


하린은 어멍과 할멍의 시선을 살핀다. 두 사람은 지친 눈으로 표정없이 숨만 고른다. 하린은 가만히 몸을 일으킨다. 돌 틈 사이를 살금살금 지나, 동굴 입구에 다가간다. 바위를 밀어내자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든다.


“조금만… 다녀올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속삭임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다.


하린은 조심스레 몸을 내민다. 바깥은 비 내린 뒤의 흙내와 풀잎 냄새로 가득하다. 골짜기 아래쪽 어딘가, 집으로 향하는 길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뗀다.


그 순간—

멀리서 탁, 탁 하고 터지는 총성이 산을 울린다.

하린은 움찔하며 발을 멈춘다. 총성은 바람을 타고 동굴 안쪽까지 스며든다.


동굴 속 어멍의 어깨가 크게 흔들리고, 할머니는 묵주 대신 돌멩이를 움켜쥔다.

“하, 하린아!”


하린의 작은 그림자는 달빛 사이로 사라지고, 산 속에는 총성만이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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