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서로 다른 시간의 아이들

1948년의 하린 • 1980년의 민수

by Bloom지연

——— 제주와 광주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앉은 하린은 손에 꼭 쥔 소라껍데기를 바라보았다. 작은 껍질은 바람에 반짝이며 빛을 머금었다. 그때, 등 뒤로 군홧발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바람 속에서 쇠내가 섞였다.

“일어나!”

날카로운 명령이 터지자, 하린의 심장이 움찔했다. 바닷바람조차 순간 멎은 듯했다.


하린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만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여러 명의 그림자가 하나둘 끌려 나왔다. 사람들은 서로 등을 떠밀리듯 줄지어 서야 했다.


모래 위에는 발끝이 남긴 선들이 켜켜이 겹쳤고, 군인들은 군홧발로 그 선을 짓밟으며 거칠게 오갔다. 어둠 속에는 총의 차가운 윤광이 번쩍였고, 바람에는 쇠내와 짠내가 섞여 피맛 같은 기운을 풍겼다.


누군가는 흐느꼈고,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삼켰다. 명령은 짧고 냉혹했으며, 그 사이사이의 침묵이 오히려 더 무겁게 사람들을 짓눌렀다.


파도 소리마저 숨을 죽였다. 바닷가는 마치 거대한 심판의 뜰처럼, 잔혹한 기운으로 잠겨 갔다.


누군가 하린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눈 감아.”


짧고 날 선 명령이 어둠 속을 갈랐다. 하린은 떨리는 눈꺼풀을 억지로 닫았다. 그 순간, 모래의 차가움이 무릎을 스쳤고, 어딘가에서 군홧발이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끝에는 차갑고 금속 같은 냄새가 스며들었다. 피비린내와 뒤섞인 듯한 쇠내였다. 파도 소리는 멀리서만 희미하게 울렸고, 그 사이사이의 침묵이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끊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몸의 무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발끝도, 팔도, 가슴도 허공에 풀려 떠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손바닥에는 단 하나의 무게가 남아 있었다. 작은 소라껍데기였다. 그것만이 여전히 현실처럼 단단했다.


하린은 그것을 귀에 바짝 대었다. 파도 소리가 아니라, 낮고 낯선 숨결이 소라 안에서 흘러나왔다. 바람이 아닌 목소리, 바닷물 아닌 인간의 기척이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하린은 온몸이 굳어졌다. 귀에 대고 있던 소라껍데기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누… 누구세요? 난… 난 하린이야.” 소녀의 속삭임은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처럼 떨렸다.


잠시, 파도보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 끝에 낮은 목소리가 번졌다.


“민수야. 난 민수.”


두 아이의 목소리는 바람결처럼 가늘고 서툴렀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이였지만,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둠 속에 작은 불빛이 켜진 듯했다.




“너무 무서워… 너무 무서워…”

하린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눈앞의 어둠이 커질수록 입술은 더 떨렸다.


“나도 무서워.”

민수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따라왔다.


“형을 좇아가다 길을 잃었어. 분명 골목이었는데, 갑자기 집 안에 있는 것 같아. 그런데 내 발끝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아. 몸이 이상해.”


하린은 바짝 소라를 움켜쥐었다.

“나도 그랬어. 분명 바닷가였는데… 지금은 굴 속 같아. 너무 적막해. 할멍도 없고, 부모님도 없어. 나 혼자야. 소라가 있어서… 그나마 덜 무서워.”


두 목소리가 울림 속에서 얽혔다. 낯설고 떨리는 공포 속에서도, 서로의 떨림이 닿는 순간만큼은 덜 외로웠다.



“우린…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산 걸까? “

하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민수는 오래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근데 네 목소리가 들리니까… 아직은 살아 있는 것 같아.”


잠시 고요가 흘렀다.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바다, 사람의 발소리가 사라진 골목. 그러나 소라 안에서는 두 아이의 속삭임이 계속 이어졌다.


“여긴 제주야. “

하린이 말했다.

민수의 숨이 멎는 듯했다.

“난 광주야.”

잠시 고요가 흘렀다. 두 아이는 서로의 호흡만 듣고 있었다.

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긴 대체 어디쯤 있는 곳이야? 난… 지금 동굴 속 같아. 햇살도 안 들어오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어. 혹시… 오늘 며칠이야?”

민수는 고개를 들어 형의 방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5월 18일이야. 1980년. “

하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5월이라고? 여긴 아직 봄이야. 정확한 날은 모르겠지만… 1948년 4월이야. 바닷바람은 아직 차갑고, 유채꽃은 정말 예쁜 달인데…“


두 아이의 말이 허공에 부딪히며, 서로 다른 진실을 드러냈다. 한 아이는 여름을 맞이한 골목에, 다른 아이는 봄의 바닷가 동굴 속에 있었다. 그러나 소라껍데기 속에서만큼은 두 목소리가 선명히 이어졌다.


민수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우린 만날 수 없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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