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파도 너머의 목소리

제주의 하린•광주의 민수

by Bloom지연

——— 제주


하린은 대문 안으로 몸을 기울였다. 밤은 깊었지만, 집 안은 아직도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엌 찬장의 문을 살짝 열어보고, 장롱 속 깊은 서랍까지 뒤적였지만 초록빛 바다유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손끝에 닿을 것 같던 빛나는 파편은 허공으로 사라진 듯 묘연했다. 혹시 누군가 이미 가져가 버린 걸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린이의 유일한 보물이었다.


방 안쪽에서 미세한 발자국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하린은 숨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들켜서는 안 된다.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온 하린의 심장은, 잡히지 않으려는 작은 새처럼 쿵쾅거렸다.


급하게 집에서 빠져나왔을 때, 거센 바람이 바닷가를 휩쓸고 있었다. 차갑게 젖은 모래 위를 뛰다 보니 신발은 어느새 벗겨져 있었다. 맨발에 스며든 모래는 차갑고 거칠었지만, 하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에서 답을 찾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파도 끝자락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하린은 눈을 크게 뜨고 달려갔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작은 소라껍데기였다. 겉면은 닳아 있었지만, 그 안쪽의 나선에는 푸른빛과 붉은빛이 교차하며 신비로운 빛을 뿜어냈다.


하린은 두 손으로 그것을 감싸 쥐었다. 마치 바다에서 건져 올린 또다른 하나뿐인 보물을 손에 넣은 것 같았다. 맨발로 서 있던 아이는 모래 위에서 한참 동안 소라껍데기를 내려다보았다. 발밑은 차가웠지만, 손에 쥔 작은 껍질은 뜨겁게 뛰는 심장처럼 느껴졌다. 숨결이 닿을까 두려운 듯, 하린은 애지중지하며 그것을 품에 안았다.


조심스레 귀에 가져가자, 웅웅 거리는 바람 소리가 껍질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곧 파도가 삼키는 함성으로 변했다.


“민주주의를 지켜라!”

“우리를 잊지 마라!”


어디선가 외치는 구호가 파도에 실려 귀로 파고들었다. 하린의 눈이 커졌다. 낯설고도 절박한 외침은 바다를 건너온 바람 같기도 하고, 하늘로 치솟는 불길 같기도 했다. 귓속이 따끔거리고 심장은 쿵쿵 요동쳤다. 소라껍데기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땅을 짓누르는 군홧발이었다.

“거기 누구야! 바다 쪽으로 가지 말랬지!”

거친 고함이 어둠을 흔들었다.


하린은 화들짝 놀라 소라껍데기를 움켜쥐었다. 모래 위로 군인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듯했다. 하린은 소라의 나선 끝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파도 소리가 껍질 속에서 먼 바람처럼 웅웅 울렸고, 그 울림은 가슴속 두근거림과 한 몸이 되었다.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오메, 이건 아무도 몰라야 혀. 부모님도 힘드신데, 내가 무섭다고 하면 더 힘드실 거잖아. 그러니까 소라야, 너만 알아. 너만 꼭 알아.”



——— 광주


민수는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창밖은 이미 어둠에 삼켜졌고, 형의 뒷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가슴은 텅 비어 있었고, 숨은 자꾸만 잦아들었다. 자신이 어디에도 닿을 수 없음을 민수는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때, 방 한쪽에 놓인 라디오가 지지직거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잡음 같았다. 그러나 곧 파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수는 고개를 돌려 귀를 기울였다. 그 파도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설지만 또렷한 속삭임이었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그러니까 소라야, 너만 알아. 너만 꼭 알아…”


민수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기계가 흘려보내는 음성이 아니었다. 어딘가 먼 곳에서, 자신과 닿아 있는 또래의 목소리였다. 민수는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홀로가 아니었다. 라디오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그는 처음으로 알 수 없는 따뜻함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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