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남겨진 목소리

4월의 하린 • 5월의 민수

by Bloom지연

민수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우린 만날 수 없는 걸까?”


그 물음은 멀고 깊었다. 바람도, 파도도 닿지 않는 곳에서 날아와 하린의 가슴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하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손에 쥔 소라껍데기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마치 그 안에 서로의 온기를 붙잡을 수 있는 것처럼.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왜 하필 우리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네 목소리랑 내 목소리가 이어진 걸까?”


민수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형이 그랬어. 그냥 이어지는 인연은 없다고. 괜히 멋 부리려고 한 말 같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그런 것 같아. 우리가 이렇게 이어진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걸지도 몰라.”


하린은 목이 메어왔다. 바위 벽에 부딪힌 울음이 되돌아왔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근데… 우리 동네 사람들은 다 착했어.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왜 그렇게 무섭게 굴었던 걸까? 왜 잡아가고, 왜 울게 하고, 왜 총을 쏘고… 난 아직도 모르겠어. 너무 억울해. 너무 무서워.”


민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그러나 단단하게 속삭였다.

“우린 아직 어려. 이 모든 걸 다 감당하기엔 너무 어리잖아. 그래서… 우리가 남겨야 하는 거 같아.”


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라껍데기를 품에 꼭 안았다.

“나도 생각했어. 나는 이 소라껍데기에 내가 본 것, 들은 것을 다 담을 거야. 엄마가 울던 소리, 군인들이 몰려오던 발소리, 동네 사람들이 붙잡혀가던 모습… 다 넣어둘 거야. 언젠가 누군가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도록.”


민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나도 형이 준 공책이 있어. 그걸 담장에 끼워놨거든. 언젠가는 누가 꺼내 보겠지. 그 안에는 형이 남긴 것이 있을 거야. 언젠가 사람들이 맞춰줄 거야.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하린은 놀란 듯 눈을 떴다.

“그럼… 너도 남긴 거네. 우리 둘 다 남긴 거네.”


민수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응. 우리가 어리니까. 우리 몫은 여기까지야. 그다음은 미래 사람들이 이어갈 거야.”


둘 사이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 고요는 무겁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안아주는 듯, 따뜻했다.


하린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민수야, 우리… 정말 착한 사람들이었지? 다들 그렇지?”


민수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럼. 넌 착한 애고, 네 동네 사람들도 다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 모두 잘못한 게 없어.”


그 대답에 하린은 아주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 미소가 동굴 속 어둠에 번져, 작은 등불처럼 흔들렸다.



그러나 그날 이후 두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옅어졌다. 파도에 실려온 듯 들리다가도, 어느 순간 모래에 스며든 물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두려움보다 깊은 그리움이었다.


하린은 알았다. 민수도 알았다. 서로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함께 있었다는 것을.


세월은 흘러갔다. 바다는 여전히 파도를 밀어냈고, 광주의 골목에는 계절마다 햇살이 비쳤다. 그러나 두 아이의 목소리는 아직도 어딘가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난 하린이야.”

“난 민수야.”


그 목소리만으로도, 어둠 속에 작은 불빛이 켜진 듯했다. 그러나 두 아이가 남긴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쪽에는 파도 속 소라껍데기가, 다른 쪽에는 담장 속 공책이 남아 있었다.


훗날 누군가 귀를 기울일 때, 그 안에서 아이들의 떨림 섞인 목소리가 바다와 바람이 되어 다시 깨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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