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꺼낸 마음이 서로를 안는다
우리 집은 대체로 시끄럽다.
방방 뛰는 발소리, 탁탁 튀는 농구공,
오빠들 웃음소리에
막내딸의 까르르 웃음이 곁들여지면,
거실은 금세 작은 운동장이 된다.
막내딸은 똑 단발에 땀이 자주 맺히는 밝은 이마,
치마보다는 늘 트레이닝복 차림에
태권도 가방을 질질 끌고 들어오는,
해사한 아이.
눈동자는 커다랗고 반짝이며,
무언가를 늘 신기하게 바라보는 듯하다.
기질은 명랑하고 순수하고,
가끔은 너무 긍정적이어서 걱정이 될 정도다.
“엄마, 나 진짜 안 틀리고 다 외웠어!”
“엄마, 나 오빠랑 진짜 웃기게 놀았어!”
둘째 오빠랑은 특별히 더 잘 맞는다.
장난감도 같이 고르고, 몰래 간식도 나눠 먹고,
엉뚱한 말장난에 같이 배를 잡고 웃는 모습을 보면
그 둘만의 작은 우주가 있는 것 같아
나는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아이 셋이 함께 있을 때의 우리 집은
항상 활기로 가득 차 있다.
그 웃음은 집 안의 공기를 맑게 만들고,
때로는 나까지 아이가 된 듯한 착각을 준다.
그런데 오빠들이 학원에 가고
집 안의 공기가 잠시 정돈된 듯 고요해지면,
막내는 말끝을 접고
혼자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 작은 발소리가 멈추는 쪽을 향해
다가가며 묻는다.
“뭐 해?”
문틈 사이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냥… 색칠.”
방금 전, 소파에서 웃음소리를 터뜨리던 아이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다.
낮고 조용하고, 어딘가 힘이 빠져 있다.
문득, 나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그 밝은 눈동자에
잠깐, 아주 잠깐
말하지 못한 마음 하나가 머무는 듯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마음이 살짝 멈칫한다.
이 아이의 조용한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무심코 그 안쪽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지금 나는 역사동화를 쓰고 있다.
내가 쓰는 이야기들은
침묵 속에 머물던 사람들의 이야기고,
소리 내지 못한 아픔을 다루는 글이다.
그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의 엄마를, 아빠를,
그들이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
나는 내 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혹시 내 딸도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진 않을까?
밝고 명랑한 기질 속에,
혼자만의 생각들이 숨어 있진 않을까?
나는 엄마고,
넌 내 딸이니까.
다 알 수는 없어도,
너의 작은 변화에 눈길이 머무를 때가 있어.
그래서 나는 다시,
가장 가까운 나의 가족의 길로 걸어 들어간다.
너의 옆으로,
조용히, 천천히, 그렇게.
나는 종종 생각한다.
감정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던 슬픔은
더 깊은 곳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엄마가 그랬고, 내가 그랬고,
그리고 이 아이도…
혹시 모르게 그러할까 봐
나는 조심스럽고 또 미안하다.
단단히 감겨 있던 감정들이
내 아이 앞에서는 그저 머무르지 않고
물 흐르듯 흘러가기를.
며칠 전, 서점에서 우연히 한 책장을 넘기다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단단하고 튼튼한 실이
부드럽고 유연해지기까지는
일곱 세대의 시간이 흐른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 한쪽이 툭 내려앉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혹시 너에게도 그런 실이 있다면,
지금 내가 그것을 바라볼 수 있을까?
끊을 수는 없더라도,
그 실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줄 수는 있을까?
엄마인 나는,
그 아이의 웃음 뒤에 숨어 있는 침묵까지도
가만히 다가가 다정하게 안아주고 싶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 시절, 내 증조할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
감히 다 알 수는 없지만,
짐작조차 미안해질 만큼
그 고통은 너무 오래,
너무 깊게 조용했을 것이다.
그 시절은 아픔조차 말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상처는 ‘수치’가 되었고
고통은 ‘더러운 것’이 되어
다시 그 사람을 찔렀다.
그날 밤 몰래 돌아오고,
개울에서 며칠을 씻고,
아무도 몰래 아이를 안고 울던 여자들.
누구도 그들을 안아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말하지도 않았다.
엄마에게도,
딸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그 침묵은 혈관을 타고 흘렀고
나의 엄마를 지나, 나에게까지 왔다.
나는 오늘,
그 흐름의 가장자리에 멈춰 선다.
거기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마음을 건네기로 한다.
이제는, 말하고 싶다.
감추지 않아도 된다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 딸이 언제나
어떤 마음이든, 어떤 고요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나는 바란다.
그 침묵이 이제는 아픔으로 이름 붙여지기를,
그 상처가 더는 감춰야 할 흠이 아니라,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로 남기를.
그렇게,
우리 가족 안에서만큼은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기를.
그건 말해도 돼.
말하면 괜찮아질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지금,
아주 작게
너에게 말을 건넨다.
“내 딸, 오늘은 기분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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