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결은 세대를 지나 나에게 흘러왔다
나는 원래 조용한 아이였을까?
아니면, 조용한 공간에 오래 머물다 보니
점점 그렇게 변해버린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내가 정말 ‘나’였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 속 나는 씩씩한 아이였다.
운동장에선 남자애들보다 더 크게 소리쳤고,
소꿉놀이 규칙도 늘 내가 정했다.
집에 돌아오면 흙 묻은 신발을
아무 데나 툭 벗어던지고,
주머니 속에서 꺼낸 개미 몇 마리를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
반쯤 열린 안방문을 벌컥 제쳤다.
“엄마! 개미 잡았어!”
나는 그 순간이 마냥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하셨고,
나는 순간, 내가 큰 잘못을 한 것만 같았다.
개미보다 작게, 내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내가 느꼈던 신기함보다
엄마의 조용한 당황이 더 크고 무거웠다.
동화책을 좋아했다.
나는 아빠가 동화 속 호랑이처럼 “어흥!” 하고
큰 소리로 읽어주길 바랐지만,
아빠는 언제나 서재로 들어가 책을 펼쳤고
그 안에서 들리는 건
작은 책장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아빠가 읽어주는 책은 늘 조용했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책은 ‘조용히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 선생님은 목소리를 높여 연기도 해줬는데,
우리 집의 책은 늘 침묵 속에 있었다.
나는 소리를 삼키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워버린 아이였다.
지금도 나는 가끔 헷갈린다.
그 시절의 내가 정말 나의 본질이었는지,
아니면 조용한 환경 속에서
몸으로 배워버린 태도와 기질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버린 건지.
타고난 것과 물려받은 것,
그 경계는 언제나 흐릿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조용한 시간 속에서 떠오르는 건
언제나 흙 묻은 신발을 신은 나였다.
엄마의 방 문을 벌컥 열던,
작고도 씩씩했던 그 아이.
나는 가끔 묻는다.
그때의 내가 진짜 나였을까?
조용하고, 차분하고,
생각이 많은 지금이 진짜 나일까?
모르겠다.
다만, 가끔 나는
그 다름의 언저리에 앉는다.
기억과 감정, 그 틈에 머물러
말하지 못한 마음들을 조용히 적어 내려간다.
아마 그것은 피로 전해진 감정의 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말 대신 조용함으로 마음을 표현했고,
아빠는 침묵 속에서 문장을 골라냈다.
부모님의 방식은 다르지만,
나는 두 방식의 여백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엄마에게서 나는 감정의 침묵을 배웠다.
소리 내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말 대신 고요히 흐르던 눈빛과 움직임 속에서
나는 역사를 느끼는 법을 익혔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상상하고,
그 침묵 속에 남은 마음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는 법을.
아빠에게서는 문장의 결을 배웠다.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
고요하게 손끝으로 밸런스를 맞추던 그 움직임은
나에게 글을 쓰는 ‘자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기억의 무게를 버티는 문장 하나를
어떻게 단단하게 세워야 하는지를.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조용한 방 안에서
침묵과 문장 사이를 오가며
한 시대의 기억을 꿰매고 있는 중이다.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조심스럽고 단단하게.
엄마에게서 온 감정의 침묵,
아빠에게서 배운 문장의 질서.
그건 선택이 아니라 유산이었다.
나는 그 유산을,
지금 이 글로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는 헷갈렸다.
왜 엄마, 아빠는 늘 심심하게 있지?
왜 자꾸 나만 말이 많지?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조각들은 결국 나를 만든 결이었다.
한 시대의 증언은 한 집의 이야기였고,
그렇게 나에게까지 흘러왔다.
나는 지금, 그 결을 이어 쓰고 있다.
라이킷과 구독은, 창작자에게
따뜻한 길동무가 되어줍니다
머문 마음은 댓글에,
인연은 책동무로 이어집니다
#기억의조각들 #그건정말나였을까 #기억의파편
#옥이의질문 #시간속의나 #한복입은소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