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건 정말 나였을까?

기억의 결은 세대를 지나 나에게 흘러왔다

by Bloom지연

나는 원래 조용한 아이였을까?

아니면, 조용한 공간에 오래 머물다 보니

점점 그렇게 변해버린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내가 정말 ‘나’였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 속 나는 씩씩한 아이였다.

운동장에선 남자애들보다 더 크게 소리쳤고,

소꿉놀이 규칙도 늘 내가 정했다.

집에 돌아오면 흙 묻은 신발을

아무 데나 툭 벗어던지고,

주머니 속에서 꺼낸 개미 몇 마리를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

반쯤 열린 안방문을 벌컥 제쳤다.


“엄마! 개미 잡았어!”


나는 그 순간이 마냥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하셨고,

나는 순간, 내가 큰 잘못을 한 것만 같았다.

개미보다 작게, 내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내가 느꼈던 신기함보다

엄마의 조용한 당황이 더 크고 무거웠다.


동화책을 좋아했다.

나는 아빠가 동화 속 호랑이처럼 “어흥!” 하고

큰 소리로 읽어주길 바랐지만,

아빠는 언제나 서재로 들어가 책을 펼쳤고

그 안에서 들리는 건

작은 책장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아빠가 읽어주는 책은 늘 조용했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책은 ‘조용히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 선생님은 목소리를 높여 연기도 해줬는데,

우리 집의 책은 늘 침묵 속에 있었다.


나는 소리를 삼키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워버린 아이였다.




지금도 나는 가끔 헷갈린다.

그 시절의 내가 정말 나의 본질이었는지,

아니면 조용한 환경 속에서

몸으로 배워버린 태도와 기질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버린 건지.

타고난 것과 물려받은 것,

그 경계는 언제나 흐릿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조용한 시간 속에서 떠오르는 건

언제나 흙 묻은 신발을 신은 나였다.

엄마의 방 문을 벌컥 열던,

작고도 씩씩했던 그 아이.


나는 가끔 묻는다.

그때의 내가 진짜 나였을까?

조용하고, 차분하고,

생각이 많은 지금이 진짜 나일까?


모르겠다.

다만, 가끔 나는

그 다름의 언저리에 앉는다.

기억과 감정, 그 틈에 머물러

말하지 못한 마음들을 조용히 적어 내려간다.


아마 그것은 피로 전해진 감정의 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말 대신 조용함으로 마음을 표현했고,

아빠는 침묵 속에서 문장을 골라냈다.


부모님의 방식은 다르지만,

나는 두 방식의 여백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엄마에게서 나는 감정의 침묵을 배웠다.

소리 내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말 대신 고요히 흐르던 눈빛과 움직임 속에서

나는 역사를 느끼는 법을 익혔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상상하고,

그 침묵 속에 남은 마음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는 법을.


아빠에게서는 문장의 결을 배웠다.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

고요하게 손끝으로 밸런스를 맞추던 그 움직임은

나에게 글을 쓰는 ‘자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기억의 무게를 버티는 문장 하나를

어떻게 단단하게 세워야 하는지를.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조용한 방 안에서

침묵과 문장 사이를 오가며

한 시대의 기억을 꿰매고 있는 중이다.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조심스럽고 단단하게.


엄마에게서 온 감정의 침묵,

아빠에게서 배운 문장의 질서.


그건 선택이 아니라 유산이었다.

나는 그 유산을,

지금 이 글로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는 헷갈렸다.

왜 엄마, 아빠는 늘 심심하게 있지?

왜 자꾸 나만 말이 많지?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조각들은 결국 나를 만든 결이었다.


한 시대의 증언은 한 집의 이야기였고,

그렇게 나에게까지 흘러왔다.

나는 지금, 그 결을 이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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