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옥이를 만나다

모감주 꽃잎이 흩어지던 날, 너를 만나다

by Bloom지연

유리호프스 꽃잎이 바람결에 흔들린다.

햇살을 머금은 노란 꽃송이들이

투명한 유리 조각처럼 반짝인다.


나는 그 찬란한 빛 속을 오래 바라보다

조용히 눈을 감는다.


눈꺼풀 너머로 금빛이 스며든다.

멀리서 은은한 바람 소리,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소리.

레몬처럼 상큼한 향이

숨결 사이로 스르르 번져든다.


순간,

모든 빛이 물속처럼 일렁이며

나를 천천히 감싼다.

나는 마치 꿈을 따라 미끄러지듯,

깊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순간,

나는 전혀 다른 곳에 서 있다.


내 발밑에는

유리호프스보다 더 짙고 진한,

무더운 여름의 햇살 속에서도 고요히 흐드러진

모감주나무의 노란 꽃이 깔려 있다.


그 꽃잎 사이에 나도,

한복을 입은 채 서 있다.


그림 속에서만 보았던 그 시절의 소녀들처럼,

나도 그 시절의 복장을 하고 있다.



햇빛이 부서지는 마을이다.

모감주 꽃향기 사이로 바람이 흐르고,

그 사이로 나는 그 아이를 본다.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아이.

허리를 단정히 묶은 검은 댕기머리,

햇살을 담은 듯 반짝이는 눈빛.


그 아이는

마치 바람보다 먼저 내게 닿는 듯 하다.

한순간,

내 안의 오래된 기억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옥이다.


내 동화 속에,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아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 아이를 부른다.


“옥이… 옥이, 맞지?”


아이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천천히 들어온다.

그 눈 속엔

슬픔도, 기쁨도 담기지 않은

맑고 투명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이 아이가 누구였는지

모두 알아차린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시간을 기다려온 사람이고,

이 아이는 그 기다림 끝에서

마침내 나를 향해 걸어오는

옥이다.


그 이름 하나만으로

가슴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나는 속삭이듯 말한다.


“옥이야…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너무 작구나.


아빠를 위해

너 혼자서 그 길을 걷지 않아도 돼.


괜찮아.

지금은, 그 말만 꺼내놓을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더 많은 걸 전하고 싶다.


하지만 말을 잇지 못한 채,

나는 점점

아이의 눈빛 속으로 빠져든다.


빛도, 소리도, 내 존재마저도

서서히 그 아이에게 녹아들고 있다.


나는 너의 이야기를 알고 있어.

그 길 끝에서 어떤 운명이 너를 기다리는지도 알아.

하지만 그걸 알려줄 수는 없어.

그럴 수 없어.


나는 역사를 거스를 수 없는,

그저 지켜보는 사람일 뿐이다.


옥이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조용히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그래도… 나, 해야 할 것 같아요. 언니.”


순간 나는 그 손을 꼭 붙잡는다.

어떻게든 이 시간을 멈추고 싶어진다.

이 아이가 이대로 어디로도 가지 않기를,

그저 이 여름 안에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란다.




“너네 집에도… 가볼까?”


나는 그렇게 말한다.

그 말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이 아이의 뒷모습을 더 보고 싶은 내 간절함이다.


우리는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바람결에 옥이의 댕기머리가 출렁이고,

햇살에 반사된 꽃잎들이 반짝인다.


돌담을 지나고,

기와지붕의 그림자 아래를 지난다.

나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 길이 끝없이 이어지면 좋겠다고,

나는 정말,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골목은 생각보다 빨리 끝난다.


조그맣고 낮은 현관문.

그 안으로 옥이가 성큼 들어간다.


안쪽엔 큰 나무 하나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그 옆 작은 마당엔 또 다른 아이가 있다.


고무줄을 하고 있는 소녀.

팔랑이는 단발머리,

밝은 색의 한복 자락.


햇살이 그녀의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고무줄은 파란 하늘 아래 투명하게 튀어 오른다.


나는 그 아이의 눈빛을 보는 순간,

단번에 알아차린다.


마사코.




그 아이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얼굴 가득 빛을 품은 채 웃으며 말한다.


“언니도 고무줄 할 줄 알아? 같이 할래?”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그 파랗고 맑은 여름 한복판에서.


두 아이를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을

가슴 깊이 삼킨다.



아이들은 모른다.

이 여름이 얼마나 덧없고,

얼마나 아픈 계절이 될지를.


그 길 끝이 얼마나 긴 어둠으로 이어질지를.


하지만 지금은,

그저 여름의 소녀들이다.


서로를 부르며 웃고, 뛰고,

고무줄을 하는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들.


나는 그 소녀들의 눈빛을 가슴에 새기며,

살며시 그들 곁으로 다가간다.


Illustration by Bloom jiyeon

Illustration by Bloom ji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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