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제주, 1948년 봄
제주의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눈부시게 펼쳐졌다. 파도는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며 찰싹찰싹 모래를 덮었다. 그러나 바닷바람은 소금기와 연기를 함께 실어와 코끝을 따갑게 스쳤다. 그리고 아침 햇살이 내려앉은 돌담과 흙담에는, 불에 그을린 얼룩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소녀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바람으로 헝클어진 단발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모래턱에 쭈그려 앉았다. 해진 저고리의 소매 끝은 실밥이 삐죽거렸고, 바람에 펄럭이는 남색 치맛자락에는 마른 진흙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맨발로 파묻힌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스며들었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에 꼭 쥔 것은 손바닥만 한 소라껍데기 하나. 이 넓고 번쩍이는 바다에서 스스로 건져 올린,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기만의 보물이었다.
소녀는 소라의 나선 끝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파도 소리가 껍질 속에서 먼 바람처럼 웅웅 울렸고, 그 울림은 가슴속 두근거림과 한 몸이 되었다.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오메, 이건 아무도 몰라야 혀.부모님도 힘드신데, 내가 무섭다고 하면 더 힘드실 거잖아. 그러니까 소라야, 너만 알아. 너만 꼭 알아."
부모 앞에서도 꺼내지 못한 말, 밤마다 골목을 스치는 발소리와 낮게 깔린 고함, 산으로 달아나던 그림자와 들판 너머까지 번진 울음. 소녀는 그 모든 두려움을 소라 속 비밀의 동굴로 밀어 넣었다.
파도는 착, 또 착, 하고 모래를 핥으며 소녀의 속삭임을 덮었다. 소녀는 그게 안심이었다. 이 큰 바다와 우렁찬 물소리가 있으니 아무도 듣지 못하리라 믿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라 속에서 바다의 숨결과는 다른, 낯선 떨림이 미세하게 전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그 속에서 기다리다 이제 막 대답하려는 듯한 떨림이었다. 소녀는 나선의 입구를 더 꼭 막고, 숨을 고른 채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그 떨림을 들었다.
그때, 멀리 떨어진 또 다른 도시.
광주, 1980년 5월
형의 방은 사람만 비었을 뿐, 여전히 형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방문 뒤 옷걸이에는 체크무늬 남방이 어깨선을 잃은 채 걸려 있었고, 눅진한 땀 냄새와 세제 향이 뒤섞여 방 안 공기를 옅게 감쌌다. 창문은 반쯤 닫혀 있었는데, 유리 너머로 오후 볕이 먼지 알갱이들을 떠다니게 했다. 멀리서는 헬기가 둔탁하게 공기를 가르며 지나갔고, 군홧발의 박동 같은 소리가 벽을 타고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책상 위에는 모서리가 벗겨진 낡은 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은색 다이얼에는 형의 손가락 기름이 얇게 번들거렸다. 소년은 형이 나간 뒤 혼자 남겨진 방에서, 심심함을 핑계로, 사실은 고요가 두려워서 라디오를 켰다.
“지지직…“
흰 잡음이 귓속을 긁었다. 소년은 바늘을 아주 천천히 밀고 당기며 바깥세상과 이어질 작은 틈을 찾았다. 고립된 도시에서 라디오는 그에게 유일한 창이었다.
바늘이 어느 눈금에서 딱 멈추는 순간, 잡음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라디오의 얇은 그물망을 뚫고 흘러나왔다. 찰싹, 찰싹 바다였다. 물결이 모래를 어루만지듯 다가와 물러가는 소리, 그리고 그 물결의 가장자리에서 떨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얹혔다.
“무서워… 아무도 몰라야 혀…”
소년은 숨을 삼키며 몸을 굽혔다. 뉴스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며, 장난처럼 변조된 소리도 아닌 목소리였다. 광주에는 바다가 없는데, 바다가 있었다.
“이게… 뭐시여…?”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자신도 놀라 귀를 더 가까이 붙였다. 어쩌면 주파수가 아니라 시간이 맞춰진 건 아닐까, 창문 밖이 아니라 아주 먼 곳에서 건너오는 누군가의 속삭임이 여기까지 도달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소년은 라디오의 몸통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누구야…? 거기 있는 거, 누구야…?”
방 안에서는 형의 남방이 바람도 없는데 가만히 흔들리는 듯했고, 라디오의 작은 스피커는 심장처럼 가느다란 떨림을 계속 내보냈다.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미 닿아 있었다. 시간을 넘어, 섬과 도시를 넘어, 시대를 넘어.
진실은 이미 길을 찾고 있었다.
라이킷과 구독은, 창작자에게
따뜻한 길동무가 되어줍니다
머문 마음은 댓글에,
인연은 책동무로 이어집니다
Bloom지연의 브런치 스케줄 (25.09.11 이후)
• 월 연재 <진실의 조각들>
• 화 Bloom지연 (읽다/쓰다/그리다/사적인)
• 수 원고준비
• 목 연재 <진실의 조각들>
• 금 개인작업
• 토 연재 <진실의 조각들>
• 일 댓글 한 스푼
발행시간 : 월 • 화 • 목 • 토 • 일 AM 07:00 발행
#제주4·3 #역사동화 #기억의바다
#Bloom지연 #서정적문장
#소녀의시선 #바다와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