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햇살 속의 그림자

제주의 하린, 광주의 민수

by Bloom지연

——— 제주


하린은 해가 비스듬히 기울기도 전, 모래턱에서 초록빛 바다유리 조각을 골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바닷물이 수십 번 수백 번 갈고닦아 매끈해진 작은 조각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하린은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잠시 들여다보다가 돌담이 이어진 마을 어귀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수미 언니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수미 언니, 이거 봐. 바다가 만들어 준 유리 사탕.”

언니가 웃으며 손으로 가리켰다.

“그거 주머니에 넣고, 엄마 심부름 잊지 말고. 장터 다녀오라 했잖아.”

하린은 입술을 내밀었다.

“금방 다녀올 건데 뭐.”


길 건너 돌담은 밤새 내린 이슬에 젖어 반들거렸고, 담 위 까만 얼룩은 햇빛 속에서도 더 새까매 보였다. 언니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 며칠 어른들이 조용히 하라 했잖아. 모르는 사람 오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래.”

돌담 너머 어른들의 웅성거림이 바람에 섞여 흘러왔다.

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우리 마을 나쁜 일 없는데.”

언니는 웃으려다 말고 돌담에 기대었다.

“나중에 크면 알게 돼. 지금은 바람이 좀 세잖아.”


그때 가게 문 앞에서 주인아주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수미야, 어멍이 찾는다! 빨리 와!”

언니는 뛰어가다 말고 하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바로 들어가. 알았지?”


언니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소리가 하나씩 꺼졌다.파도는 여전히 오고 갔지만, 방금 전 사람 냄새와 말소리가 빠져나간 자리엔 바람만 남아 허전해졌다.


돌담 아래에도 바람에 쓸려온 모래가 한 움큼씩 모여 있었다. 하린은 그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글자를 써 내려갔다. 선생님이 칠판에 가르쳐준 단어.

‘학교’.

‘친구들’.


“어? 아직 다 안 썼는데…”


혼잣말을 하는 사이, 바람이 불어와 모래글자를 흐트러뜨렸다. 하린은 급히 메우려 했지만, 그 순간 등 뒤에서 어른들의 낮은 말소리가 스쳤다.

“밤에 순찰 돈다 카던데.”

“장터에서 또….”

문득 멈춘 말끝에서, 하린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모래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순간 바람이 방향을 바꿔 돌담 틈새로 파고들었다. 바람 속에는 소금기와, 오래전에 꺼진 듯했던 타는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그녀는 코끝을 문지르며,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언니가 정말 있었던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모래 위 발자국을 더듬었다. 발자국은 금세 허물어져 모래와 섞였다.


“어멍?”

하린이 작게 불러 보았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햇살은 그대로인데, 바닷물이 순간 검푸르게 뒤집히는 착각이 스쳤다.

“누구 있어요?”

그녀는 파도 쪽이 아닌, 돌담 그림자를 향해 물었다.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어졌다가, 다시 줄어들 뿐이었다.



——— 광주


광주는 낮부터 사람들을 삼키고 있었다. 민수는 종례가 끝나자마자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왔다. 정문 쪽에 선 친구 재호가 손짓했다.

“야, 금남로 쪽으로 가지 말래. 아버지가 TV 보더니 광주에 폭도들 나왔다고 하시더라. “

“TV? 우리 집은 라디오뿐인데.”

민수가 받아치자, 재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학원은 쉬라네. 버스도 몇 대는 안 선다더라.”


교문 밖, 은행나무 가로수는 이파리 색이 진했고 햇살이 아스팔트 위에 쨍하게 튕겨 올랐다. 정류장 옆 김밥집에서는 라디오 아저씨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민 여러분, 가급적 외출을 삼가시길…“

주인아주머니가 짧게 내뱉듯 말했다.

“학생들아, 얼른 집에 들어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골목을 순찰차 한 대가 느리게 지나갔다. 차창 너머 시선이 민수와 잠시 마주쳤다가 이내 흘러갔다. 재호가 깔깔 웃으며 일부러 큰 소리로 떠들었다.

“겁낼 거 뭐 있냐. 우린 학생이야. 뭐 어쩔 건데? “


그때 옆 반 수진이가 김밥 한 줄을 종이에 감아 들고 나와 민수에게 건넸다.

“집에 가다가 배고플까 봐. 우리 엄마가 많이 싸줬어.” 민수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네가 먹어. “

재호가 옆에서 킥킥 웃으며 거들었다.

“야, 민수는 좋겠다. 아우, 나도 배고픈데.”

수진이는 민수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럼 먼저 간다!”

그녀는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재호도 핸드볼 연습이 생각났다며 학교 쪽으로 되돌아갔다.


순식간에 정류장 앞은 조용해졌다. 햇빛은 뜨겁게 내리 꽂혔고, 벽에 붙은 먼지가 달궈져 냄새를 피워 올렸다. 민수는 손에 남은 김밥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접었다 폈다. ‘가급적 외출을….’ 라디오 속 말은 중간중간 끊겼고, 버스는 안내문을 붙인 채 서지 않고 지나갔다.

“어휴, 진짜 안 서네.”

민수가 혼잣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순간, 은행나무 잎사귀 사이로 번지던 빛이 갑자기 흐려졌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마치 거대한 것이 하늘을 스쳐 햇살을 가린 듯했다. 멀리 사거리에서 웅성거림이 일더니, 사람들이 가게 안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김밥집 아주머니가 셔터를 반쯤 내리며 외쳤다.

“학생! 너도 들어와!”

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금방 갈게요!”


셔터가 덜컥 내려간 뒤, 길가 안내방송 스피커가 지지직거리더니 꺼졌다. 순간, 모든 소리가 동시에 멈춘 듯했다. 버스 바퀴 소리, 발자국, 멀리서 들리던 확성기까지. 민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가로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 은행나무줄기와 겹치며 두 겹, 세 겹의 어두운 띠를 만들었다.


“거기 누구예요?”

민수는 웃으려 했지만 목소리는 바짝 말라 있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놀리듯 중얼거렸다. “뭐야, 겁먹었냐, 민수야.”


손에 쥔 김밥 종이가 땀에 젖어 축 늘어졌다. 그때 은행나무 잎 하나가 민수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 작은 그림자조차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민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 방금 전까지 곁에 서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가 한 발 뒤로 물러서자, 길가 표지판의 그림자와 자신의 그림자가 겹쳤다가 천천히 어긋났다.

“누구… 있어요?”

이번에는 더 낮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햇빛이 다시 흐려지더니, 어둠이 말없이 그의 발끝을 스쳤다.



——— 제주


하린은 바닷가 슈퍼 앞에서 소금 사 오라는 엄마 심부름을 떠올리며, 비어 있는 계산대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카운터에 앉아 있던 주인 할멍은 자취를 감춘 듯 보이지 않았다.

“할멍?”

문 쪽 발판을 밟자 삐걱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아무 대답은 없었다. 하린은 바다유리를 꼭 쥔 채 문 밖으로 나왔다.

마을 골목은 햇빛으로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조용했다. 먼 데서 개가 한 번 짖고 그쳤다. 그녀는 돌담을 따라 걷다가 그림자 앞에 멈춰 섰다. 그림자는 낮은 담을 넘어 길바닥까지 길게 흘러내려왔다.

“수미 언니…?”


하린은 아까 헤어진 언니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어디선가 문 닫히는 소리만 둔탁하게 울렸다. 하린은 심호흡을 했다.

“바람 때문일 거야. 바람이 장난치는 거지.”


숨을 내쉬자 조금 괜찮아졌다. 그러나 그림자는 방향을 바꾸지도,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서 하린을 기다리는 듯 고요히 놓여 있었다.

그녀가 한 발 다가서자, 그림자 테두리가 미세하게 물결쳤다. 그 순간, 귓속에서 낮게 깔린 소리가 울렸다. 파도 소리와도, 사람 목소리와도 다른 소리.

“하린아. “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본 하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급히 모래 위에 ‘학교’라는 글자를 쓰려했지만, 다 쓰기도 전에 바람이 불어와 글자가 흩어져 버렸다.

“거짓말….”

하린의 속삭임이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 햇살 아래, 그림자는 더 길어졌다.



——— 광주


금남로 정류장 앞에서 민수는 김밥 종이를 돌돌 말았다.

“엄마가 안 기다리면 좋겠다.”

그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누군가 “민수야” 하고 부르는 듯했다. 재호가 돌아온 줄 알고 반가워 돌아섰다. 아무도 없었다. 김밥집 셔터 사이로 아주머니의 그림자만 길게 바닥에 드리워져 있었다. 민수는 웃어 보였다.

“이상하네. 내가 왜 이러지.”


그런데 방금 전, 어딘가에서 정말 그의 이름을 불렀다. 확신할 수 있었다. 소리가 멎어 버린 거리 한복판에서, 누군가 아주 낮게, 조심스레, 그러나 또렷하게. 그는 가방 끈을 더 세게 쥐었다. 은행잎이 팔꿈치에 스치며 내려앉았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잎사귀는 스스로 흔들렸다. 햇살은 한나절 내내 뜨거웠지만, 민수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땀방울은 차갑기만 했다.

“거기… 누구예요?”


그는 힘주어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가로수의 긴 그림자가 발끝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가, 그의 그림자와 겹쳐 한 몸이 되었다. 민수는 그 순간,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다. 보이지 않을 뿐, 무언가가 이 거리에, 이 한낮의 빛 속에, 이미 와 있었다.





제주의 하린과 광주의 민수


둘은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지만 같은 하늘 아래에서 햇살 속 어둠을 동시에 배웠다.


어둠은 밤처럼 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모두가 잠깐 고개를 돌린 바로 그 틈에, 그림자처럼 길어졌다가 줄어들며,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그들 곁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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