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붉디붉은

봉숭아 물든 손끝, 분필로 쓴 글자

by Bloom지연

——— 제주


돌담 아래, 햇살이 환히 내리쬐는 마을 어귀에 소녀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하린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봉숭아 꽃잎을 비비고 있었다. 손끝에서 꽃잎이 으깨지며 붉은 즙이 번졌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꽃잎 향기가 은은히 퍼졌다.


수미 언니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렇게는 손톱에 잘 안 들어가. 자, 손톱 내밀어 봐.”

언니가 꽃잎과 백반을 올려 천천히 눌렀다. 붉은빛이 손톱 안쪽으로 촉촉이 스며들었다.

“우와, 진짜 예쁘다!”


은지가 소리치자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손뼉을 쳤다.

“첫눈 올 때까지 안 지워지면 첫사랑이 이뤄진대.”

언니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아이들 눈망울이 커졌다가, 이내 폭소가 터졌다. 첫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괜히 부끄럽고 신기한 듯 서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하린은 언니 손톱을 슬쩍 보았다. 언니 손톱은 길쭉하고 매끈해 붉은빛이 더 곱게 비쳤다. 자기 손톱은 짧고 울퉁불퉁해 색이 얼룩져 있었다. 괜히 속이 상해, 주머니 속 바다유리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난 이것도 있어… ”


하지만 아이들 웃음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하린은 순간, 자기가 다른 세계에 혼자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의 웃음은 멀리 바다까지 번져갔지만, 하린의 귀에는 파도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바로 그때였다. 멀리서 ‘쿵’ 하는 문 닫히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아이들의 웃음이 물속 기포처럼 순식간에 꺼졌다. 동시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골목 끝에서 총을 멘 순찰병이 걸어오고 있었다. 총끝이 햇살에 번뜩이며 아이들 쪽으로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숨결마저 줄어든 순간, 은지는 손톱 위의 붉은 물을 급히 가리려다 말았다. 다른 아이들 역시 손을 움츠리다 얼어붙은 듯 멈췄다. 병사의 군홧발 소리가 바닥을 짓눌렀다.

“여기서 뭐 하냐?”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돌담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돌멩이를 주워 쥔 채 손에 땀을 흘렸다. 하린은 본능적으로 은지 손을 꼭 잡았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왔지만, 결국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꽃놀이예요.”


병사는 한동안 아이들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눈빛은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차갑고 무거웠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차갑고 무거워 마치 돌담 속에서 튀어나온 짐승 같았다. 그러나 이내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총끝이 바람을 가르며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은 병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꼼짝하지 못했다. 숨도 제대로 못 쉬다가, 그림자가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비로소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은지가 울먹이며 속삭였다.

“우리… 이제 집에 가자.”


아이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웃음도, 말소리도 없이 발걸음만 바스락거렸다. 하린은 자리에 남아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쁘기만 하던 붉은 물이, 지금은 무섭게만 보였다. 마치 지워지지 않는 상처 같았다. 그녀는 손톱을 옷자락으로 문질렀지만, 붉은빛은 쉽게 번지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빛은 마치 보이지 않는 눈길처럼 그녀를 붙잡는 것 같았다. 바람은 멎은 듯 고요했고, 멀리 바다 위 갈매기 울음마저 낯설게 들려왔다.



——— 광주


민수는 형 책상 위에서 빨간 분필을 발견했다. 그림을 그리던 흔적 같기도 했지만, 요즘 형이 몰래 벽보를 만들던 걸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중학생인 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분필을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정류장 옆 담벼락에는 밤새 붙은 벽보가 반쯤 뜯겨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민수는 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주머니 속 분필을 꺼내 들었다. 차갑던 손끝이 분필을 쥐자마자 달아올랐다. 벽보의 빈 자리가 마치 자신을 부르는 듯 보였다.


민수는 벽보 앞에 서서 분필을 움켜쥔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호기심 어린 눈길을 잠깐 보냈다가 고개를 돌렸다. 골목 저편에서는 군복 차림의 병사 둘이 어깨를 맞대고 걸어가는 모습이 언뜻 스쳐갔다.


민수의 심장은 점점 빨리 뛰었다. 분필 끝이 담벼락에 닿자, ‘사각’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모든 소리가 멎고, 오직 자신의 손끝과 담벼락만이 세상에 남은 듯했다. 그는 글자를 쓰려 했지만, 손이 덜덜 떨려 획이 삐뚤게 흘렀다.


순간, 뒤에서 누군가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수는 얼른 몸을 웅크리며 분필을 손바닥 속에 감췄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민수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다시 담벼락을 향해 분필을 뻗었다. 손끝이 벽을 긁자 가루가 흩날리며 붉은 선이 번졌다.


가자!

허공에 붉은 가루가 흩날렸다. 순간 장난 같으면서도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민수야, 뭐 하는 거야?”

뒤에서 형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형이 달려와 그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냥 써본 건데?”

“너 미쳤냐? 지금 이게 장난이냐? 걸리면 끝장이야!”


형은 손에서 분필을 낚아채며 눈을 부릅떴다. 그때였다. 뒤에서 군홧발 소리가 뚝뚝 다가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헬멧을 눌러쓴 군인 한 명이 이쪽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민수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심장이 귀까지 울렸다. 형이 낮게 욕을 내뱉으며 외쳤다.

“빨리 와!”

민수를 끌어 골목으로 달렸다. 담벼락을 따라 죽을힘을 다해 뛰는 동안 민수의 손끝에서 분필 가루가 흩어졌다. 땀에 젖은 손바닥은 차갑게 식어갔다.


군인의 그림자가 골목 입구를 막았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둘은 숨조차 삼켰다. 민수는 주머니를 더듬었다. 작은 분필 조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것은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형! 근데 형도 하잖아!”

민수의 떨리는 목소리에 형은 잠시 말이 막힌 듯 침묵했다. 그러나 이내 낮고 단호하게 내뱉었다.

“나는 해야 해서 하는 거야. 넌 하지 마.”


그 말은 민수의 가슴에 깊이 꽂혔다. 장난처럼 시작했던 일이 더는 장난이 아님을 알았다.



——— 제주


하린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손톱부터 들여다보았다.

언니 수미의 손톱은 길쭉하고 곱게 물들어 예뻤는데,

자기 손톱은 여전히 몽땅하고 울퉁불퉁했다.

붉은 물이 번진 손끝을 자꾸만 흔들다 결국 이불속으로 쑥 감추었다. 눈을 감았지만,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이거, 진짜 지워지는 거 맞아?”

속으로 중얼거리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손톱이 자라났다. 쑥, 쑥. 끝도 없이 길어졌다. 모두 새빨갛게 물든 채 땅에 끌릴 만큼 늘어났다.

하린은 기겁했다.


‘이 손톱으로 학교에 가면? 연필을 어떻게 잡지? 글씨는 쓸 수 있을까?’

손톱은 자꾸 부딪혀서 “딱, 딱” 소리를 냈다.

‘할망 등 긁어달라 하면, 부러질 텐데… 손톱 부러지면 엄청 아픈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른 애들 손톱도 다 이렇게 긴 걸까?‘

‘혹시 언니 손톱도 이렇게 붉게 자라난 걸까?’

하린은 눈물이 핑 돌았다.

“난 괜히 했어…!”


헉, 숨이 턱 막히며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이 방 안에 쏟아지고 있었다.

하린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짧고 못생긴 자기 손톱.

붉기는 했지만, 더 자라 있진 않았다.

하린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밖으로 나가니 은지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어제처럼 붉은 손톱을 내밀고 있었다. 언니 수미의 손톱도 빛나고 있었다.


하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난 짧아서 다행이야… 할망 등은 긁어줄 수 있잖아.”

손톱 끝에 먼지가 끼면 닦으면 되고, 무섭긴 해도 다 같이 같으니 조금은 괜찮았다.


짧고 못생긴 손톱을 보며 하린은 안도했다.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알 수 없는 떨림이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이 붉은빛이,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에게도 이미 번져 있는 것처럼.



——— 광주


민수는 교실 칠판 앞에 서 있었다.

붉은 분필로 썼다가 서둘러 지운 듯, 희미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햇살이 기울자 그 가루가 은빛처럼 반짝였다.


“야, 또 누가 장난친 거 아냐?”

재호가 히죽 웃으며 팔꿈치로 민수를 툭 쳤다.

“밤마다 몰래 나온대. 진짜 겁도 없지.”

옆에 있던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맞장구쳤다.

하지만 민수는 웃지 못했다.

눈앞에 남은 흔적은 분명 장난이 아니었다.

형이 새벽마다 집을 나서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민수는 모르게 손끝을 꽉 쥐었다.


수업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류장 담벼락에서 벽보 한 장이 뜯겨나가는 걸 보았다.

군인 한 명이 손아귀로 벽보를 북북 찢어내고 있었다.

종이가 바람에 갈기갈기 흩날렸다.


“야, 그냥 가자.”

재호가 목소리를 낮추며 민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모른 척 고개를 숙였다. 발걸음 소리만 빨라졌다.


하지만 민수는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목이 바짝 말랐다. 재호는 벌써 몇 걸음 앞서 가고 있었지만, 민수의 가슴속에는 그 붉은 흔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제주의 하린과 광주의 민수


서로 알지 못했지만, 같은 하늘 아래 다른 빛을 받으며 어린 마음으로 두려움을 배웠다.

한쪽은 손톱의 꽃물로, 다른 한쪽은 주머니 속 분필로.

그 붉은 자국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은 밤하늘에 묻힌 작은 불빛처럼, 언젠가 다시 드러나기 위해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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