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숨은 노래

한줄기 빛, 어둠을 뚫고

by Bloom지연

——— 제주


바람이 세차게 불며 돌담 틈새를 스쳤다. 하린은 담벼락 곁에서 무언가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바람에 날려온 듯, 젖은 종이 한 장이 돌담 틈에 걸려 팔랑거리고 있었다. 하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종이를 집어 들었다. 가장자리는 찢겨 있었고, 군데군데 소금기가 흰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그러나 가운데 글씨만큼은 또렷했다.


“아아, 한 줄기 빛, 어둠을 뚫고 나가자…”


하린은 숨을 죽이며 작은 소리로 따라 읽었다. 낯선 말들이 입술에 맴도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노래 같기도 하고, 시 같은 글 같기도 했다.


하린은 얼른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품에 넣었다. 누군가 훔쳐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눈을 감자, 파도 소리와 함께 귀속에서 희미한 선율이 번져왔다.

‘바람이 장난치는 걸까? 아니면 종이 속에 갇혀 있던 소리가 깨어난 걸까?‘


하린은 종이를 넣은 품을 한번 더 꼭 눌렀다. 주름이 잡히는 줄도 몰랐다.

돌담 너머로 바람이 휙 불며 억새풀을 쓰다듬었다. 할망이 늘 말하던 바람 냄새였다.

“해녀 언니들이라면 알고 있을까, 아니면 학교에서 언젠가 가르쳐줄까."

혼잣말은 바람 속에 흘러 사라졌지만, 하린의 가슴속에는 묘한 울림이 오래 맺혀 남았다.



——— 광주


민수는 교문을 빠져나와 담벼락을 스치듯 걸었다. 오후 햇살은 머리 위로 작열했고, 아스팔트 위에서 내뿜는 열기가 숨통을 조여왔다. 담벼락에는 낡은 벽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으나, 많은 것이 뜯겨 나가거나 반쯤 찢겨 있었다. 민수의 시선이 한 전단에 멈췄다. 찢긴 종이 사이로 짧은 글귀가 남아 있었다.


“아아, 한 줄기 빛…”


민수의 눈이 커졌다.

‘노래인가? 이런 가사는 처음 보는데…’

순간, 형의 얼굴이 스쳤다. 며칠 전, 집안 구석에서 낡은 신문을 펼쳐 보던 형. 혹시 그때도 이런 글귀를 본 걸까. 형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민수는 무심코 전단을 손끝으로 눌렀다.

붉은 가루가 묻어났다. 벽보에 흩뿌려진 분필가루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처럼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때, 뒤에서 군화 발소리가 또각또각 울려왔다. 민수의 몸이 반사적으로 굳었다. 전단을 얼른 떼어내려다 멈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더니 발소리가 코앞에서 멈췄다. 군홧발이 가까워지더니, 낮은 목소리가 스쳤다.

“괜히 얼쩡대지 마라.”

민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심장이 귀까지 울렸다. 그러나 곧 군화 소리는 멀어져 갔다.


민수는 땀에 젖은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 위에 남은 붉은 가루가 눈부시게 번져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여전히 그 짧은 글귀가 겹쳐 떠올랐다.

'겁먹은 건가? 아니면… 정말 노래가 있었던 건가?'



——— 제주


해질 무렵, 하린은 동무들과 돌담 그늘에 모여 앉았다. 바닷바람은 저녁빛을 머금고, 아이들의 머리칼 사이를 흩날렸다. 하린은 품에서 아까의 종이쪽지를 꺼냈다. 종이는 축축했지만, 글씨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거… 내가 바다에서 주웠어.”


은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왔다.

“글씨네? 뭐라고 적혀 있어?”

하린은 숨을 죽이며 쪽지를 펼쳤다.

“아아, 한 줄기 빛, 어둠을 뚫고 나가자…”


아이들의 눈망울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낯선 단어들이 마음속을 톡, 건드린 듯했다.

“이거 우리 선생님이 가르쳐 준 노래는 아닌데…”

“혹시 들키면 안 되는 거 아냐?”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글귀를 따라 읊었다. 파도 소리에 섞여 바람에 흘러간 목소리는 금세 흩어졌다. 그러나 입술 위에 남은 떨림은 오래도록 가슴에 맺혔다.


그 순간, 하린은 무심코 수미언니를 떠올렸다.

‘수미언니라면 이 말들을 아는 걸까? 아니면 어른들만 아는 비밀일까? ’

‘학교’, ‘친구'같은 글자와는 전혀 다른 울림. 마치 어둠 속에 숨겨둔 작은 불씨 같았다.


그 시각, 멀리 떨어진 또 다른 거리에서도

누군가 같은 글귀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 광주


민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방끈을 더 세차게 움켜쥐었다. 전단지에서 본 그 글귀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아, 한 줄기 빛… 어둠을 뚫고 나가자…”


입술이 저절로 달싹였다.

‘이게 뭐라고… 자꾸만 떠오르지?”


멀리 금남로 쪽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상인들이 서둘러 가게 셔터를 내리는 소리,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경고 방송, 그리고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 사이로 아주 낮게, 그러나 또렷하게 같은 가락이 번져왔다. 누군가 노래하고 있었다.


민수는 온몸이 굳었다. 그러나 귀는 분명히 듣고 있었다.

“아아, 한 줄기 빛…”

그 순간,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거리는 다시 고요해졌다. 목소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민수는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분명히… 있었어. 누군가 부르고 있었어.’


한낮의 열기 속에서 몸은 오히려 떨렸다. 고개를 들자, 은행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그림자 속에서 노랫말이 다시 깜박였다.

“아아, 한 줄기 빛, 어둠을 뚫고 나가자.”


그 순간, 바다 건너 아이들의 입술 위에도

같은 노래의 떨림이 번져가고 있었다.





제주의 하린과 광주의 민수


두 아이는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지만, 같은 하늘 아래서 낯선 노랫말을 동시에 배웠다.

그 노래는 바람에 흩어져 금세 사라졌지만, 아이들의 가슴에는 이유 모를 작은 떨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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