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바람이 묻어둔 말

제주 1

by Bloom지연

1948년 봄, 제주.


돌담에 햇살이 눕는다. 풀잎은 바람을 따라 누웠다가 일어난다. 귤꽃 향이 작게 번진다. 멀리 바다는 은빛으로 반짝인다.


할망은 물허벅을 머리에 이고 들어와 마당에 내려놓는다. 무거운 물허벅이 땅에 닿는 순간, 숨이 길게 터져 나온다. 허리를 펴며 이마의 땀을 훔치고, 얼굴에는 웃음이 번진다. 그제야 물허벅이 햇살을 받아 붉은빛을 머금는다.

“허리야, 허리야… 그래도 물은 내가 길어와야지. “


부엌에서 된장국이 끓는다. 갓 구운 김이 신문지 위에 차곡차곡 쌓인다.

“하린아, 밥상에 앉아라. 김 식는다.”

어멍이 부른다. 하린은 신문지 위에 김을 가지런히 펼친다. 손끝에 소금기가 닿는다. 주머니에서 바다유리를 꺼내 햇살에 비춰본다. 초록 조각이 반짝이고, 눈 속 어딘가가 잠깐 시원해진다.


아침 밥상은 단출하다. 김, 단무지, 조기구이, 된장국.

“많이 먹어라, 학교 가면 배고프다.”

어멍이 국을 덜어준다.

“아범은 또 나갔냐?”

할망이 묻는다.

“새벽에 진작 나갔어요.”

어멍이 대답한다.

할망이 젓가락으로 조기를 뒤집으며 중얼거린다.

“바람 불면 배가 금방 꺼진다. 든든히 먹어.”

하린은 고개를 끄덕인다. 숟가락 소리가 그릇과 부딪혀 작은 울림이 번진다.


집을 나서자 바람이 옷깃을 잡아당긴다. 돌담 사이로 닭들이 모래를 쪼고, 골밭 어귀에서 까치가 운다. 골목 끝에서 정화가 손을 흔든다.

“빨리 와! 오늘 1교시 체육이야.”

둘은 뛰기 시작한다. 먼지가 햇살에 떠올라 부옇게 흔들린다.


교문을 지나 운동장이 펼쳐진다. 흙바닥은 햇살에 바짝 말라 울퉁불퉁 갈라져 있다. 책가방을 교실에 내려놓고, 우리는 곧장 운동장으로 모였다. 호루라기가 울린다.

“자, 두 바퀴!”

발끝이 흙먼지를 차올린다. 한 바퀴, 두 바퀴. 햇살이 뜨겁게 내려앉고, 발자국이 잇달아 이어진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쿵쿵 뛰어오른다.

“하린아, 더 빨리!”

정화가 웃으며 외친다.


그때였다. 교문 너머로 낯선 그림자가 스친다.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는 헬멧, 군복, 햇살에 번쩍이는 어깨 단추. 아이들 웃음소리가 퍼지는데도, 그 그림자는 소리를 눌러버린다.

하린은 본능처럼 고개를 돌린다. 가슴이 툭 내려앉는다. 눈길이 머문 자리, 친구들이 뛰어 들어오는 그 교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군화가 눈에 무겁고 거칠게 박혀온다.


종이 울린다. 교실로 돌아온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이어간다. 창가에는 웃음이 번진다. 복도 끝에서는 누군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러나 하린은 그 웃음에 섞이지 못한다. 창문 너머로 운동장이 보인다. 흙바닥에서 흰 종이 조각이 바람에 밀려 구른다. 굴렀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별것도 아닌데, 왜…’

마음 한편이 어쩐지 불안하다. 체육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 종이를 집어 든다. 얼굴빛이 잠깐 굳고, 아무 말 없이 교무실로 걸어간다. 하린은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본다.


국어 시간. 칠판 분필 소리가 까끌까끌 교실을 긁는다.

“따라 적어라.”

자음과 모음이 줄을 서는 동안, 하린의 손은 느려진다. 창문 틈새로 바람 소리가 스며든다. 책상 끝이 떨리는 것 같다.

정화가 옆구리를 쿡 찌른다.

“왜 멍해? 종 치면 구슬치기 하자.”

하린은 작은 소리로 대답한다.

“응… 근데 방금, 교문 쪽에….”

“뭐?”

“아니야.”

말끝이 허공에 흩어진다.


쉬는 시간, 아이들이 복도로 쏟아져 나온다. 솔잎처럼 가늘게 웃는 소리, 신발 끄는 소리, 달리는 소리가 뒤섞인다. 하린은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운동장을 내려다본다. 종이 조각은 사라졌다. 대신 벽보 하나가 남아 있다. 모서리가 뜯긴 채 교문 기둥에서 파르르 흔들린다.

‘무슨 글이었을까. 누가 가져갔을까.’

귓불이 뜨끈하다. 심장이 옷 속에서 옅게 떨린다.


점심시간. 도시락 뚜껑을 열자 김밥 냄새가 퍼진다.

정화가 한 줄을 덥석 집어 먹는다.

“너네 집 김, 진짜 맛있다.”

하린이 웃는다.

“아침에 내가 폈어.”

정화가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뜬다.

“근데 아까 왜 말하다 말았어? 교문에 뭐 있었어?”

하린은 잠깐 망설인다.

“군인… 같은 사람이 서 있었어.”

“에이, 순찰이지 뭐. 요즘 맨날 돌아다니잖아.”

“그래도….”

“걱정 마. 우리 내일도 체육 있대. 또 뛰자.”

정화의 목소리는 가볍고 밝다. 그러나 그 밝음은 이상하게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오후 수업이 끝난다. 교문을 나서며 하린은 다시 고개를 든다. 군화 발걸음이 스쳐간 자리, 절반쯤 흩어졌지만 간격만은 여전히 또렷하다. 바람이 먼지와 소금기를 함께 몰고 와 코끝을 스친다. 어딘가 매캐한 기운이 섞여 있다.


해가 기운다. 마당에 길게 그림자가 눕는다. 할망은 마른 고추를 널고, 어멍은 저녁국을 끓인다.

“오늘 학교는 어땠노?”

할망이 묻는다.

“그냥… 괜찮아. “

하린이가 숟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한다. 어멍이 국을 덜어주며 말한다.

“얼굴이 피곤해 보이네. 일찍 자라.”

하린은 고개를 끄덕인다. 국물은 뜨겁다. 혀끝에 잠깐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녁 바람이 세진다. 대문이 덜컥거리고, 창문틀이 가볍게 떤다. 방 안에서 바다유리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본다. 방 등 불빛이 초록 조각을 밝힌다. 그 작은 빛이, 낮에 보았던 흰 종이 조각의 가장자리와 겹쳐 보인다.


‘내일은… 괜찮을까.’

눈을 감으려 해도, 교문 너머의 그림자가 다시 선다. 헬멧, 단추, 군화 자국. 그리고 이름 없이 굴러가던 흰 종이. 바람이 창문을 한 번 더 흔든다.

“괜찮을 거야.”

하린이 작게 속삭인다. 그러나 대답은 없고, 어둠만이 천천히 방 안으로 스며든다.


그때, 방문 밖에서 할망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범, 왜 이리 늦게 다니노…”

낮게 흘러나오는 말에, 아버지가 돌아온 것을 하린은 안다.


밤이 깊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한 번, 두 번 밀려오다가 곧 사라진다. 하린은 누운 채로 문득 생각한다.

‘내일, 학교에 가면….’

문장은 거기서 끊긴다. 마음 한쪽에서 작은 떨림이 계속 두드린다. 다음 날의 바람이, 이미 창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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