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바람이 모으는 소문

제주 2

by Bloom지연

1948년 봄, 제주.


아침부터 공기가 조금 다르다. 햇살은 환한데, 교정에 묘한 정적이 걸린다.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줄을 맞춰 교실로 들어간다.


선생님이 국어책을 펼치다 말고 천천히 덮는다. 분필을 집어 칠판 위에 몇 글자를 적는다.

‘조용히. 질서. 함께.’

“오늘은 이걸 읽자.”

목소리가 낮다. 조금 떨린다.

“조용히.”

아이들이 따라 읽는다.

“질서.”

“함께.”

아무도 뜻을 묻지 않는다. 분필 가루만 공중에 얇게 머문다.


정화가 속삭인다.

“이게 뭐야?”

하린은 고개를 젓는다.

선생님은 잠깐 창밖을 본다. 교문 쪽을 오래 본다. 다시 칠판을 본다.


쉬는 시간. 아이들이 복도로 쏟아져 나온다. 복도 게시판에는 낯선 벽보가 붙어 있다.

‘거짓말을 퍼뜨리지 맙시다.’

한 모서리가 조금 뜯겨 나갔다. 아침 바람이 구석에서 벽보를 살짝 들었다 놓는다.

“누가 또 장난쳤나?”

어떤 아이가 웃는다.

그때 반장 언니가 다가와 종이를 곧게 누른다. 표정이 굳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체육 시간이 온다. 호루라기 소리.

하린은 교문 쪽을 본다. 어제의 군화 자국은 반쯤 지워져 있다.

새 자국이 그 옆에 놓인다. 간격이 같다. 깊이도 비슷하다. 오늘 찍힌 것 같다.

‘또 왔구나.’

숨이 잠깐 막힌다. 달리기 시작하면 그 생각도 따라 달린다.


하굣길. 햇살은 부서지고, 길모퉁이 그늘이 길어진다.

정화와 헤어져 혼자 걸을 때, 앞쪽에서 군인 둘이 총을 어깨에 메고 다가온다. 군복에서는 햇빛이 조금 튕긴다. 그들의 발소리는 한 박자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지나가던 아주머니는 바구니를 품에 안고 고개를 푹 숙이고, 하린은 돌담에 등을 붙인다. 그들이 스치고 나서야 늦은 먼지가 인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발소리만 일정하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왜….’

심장이 작은 소리로 두 번 뛴다.


장터로 이어지는 사거리엔 사람들이 모여 작은 목소리를 흘린다. 하린은 가까이 가지 못한다. 몇 낱말이 바람을 타고 흐른다.

‘밤.’ ‘연락.’ ‘조심.’

어떤 아저씨가 하린을 보고 “학생, 얼른 집에 가.” 하고 손짓한다.

하린은 고개만 끄덕이고 걸음을 재촉한다.


집에 도착하니 마당에 햇빛이 기울어 있다. 할멍이 마른 고추를 뒤집는다.

“왔나.”

부엌에선 저녁국이 보글거린다. 소리는 이내 잦아든다. 저녁 밥상도 소박하다.

할멍이 아버지 등을 살짝 치며 말한다.

“괜히 돌아다니지 마라. 저쪽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도 마라. 그 말들, 믿지도 마라.”

아버지가 젓가락을 툭 내려놓는다.

“그렇게만 살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면 안 됩니다.”

“입조심부터 해라. 말이 화를 부른다.”

“말을 닫으면 더 어두워집니다.”

목소리는 낮다. 그러나 단단하다. 숟가락 소리가 그릇에서 딱, 한 번 울린다.


하린은 밥을 김에 싸서 한입 넣는다. 씹는 소리만 또렷하다. 말 뜻은 잘 모르지만 공기 속에 얇은 막이 끼어드는 느낌이다.

‘아빠와 할멍이 싸우는 건 아니야. 그런데….’

어멍이 말한다.

“어서 먹읍시다.”

할멍이 하린을 본다. 눈빛이 잠깐 길다.

“어른들이 하는 말, 밖에 가서 떠들지 마라. 학교에서도. 친구들한테도. 알았제?”

하린은 고개를 끄덕인다. 목이 저절로 마른다.


저녁을 마치고 마당에 나가면 바람이 강해져 있다.

대문이 덜컥거리고, 돌담 틈새에 풀잎이 눕는다.

골목 어귀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났다가 사라진다. 진짜였는지 모르겠다.

방에 들어와 등잔불을 켠다. 불꽃이 잠깐 흔들린다.

하린은 바다유리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본다. 초록빛 속에 작은 불꽃이 박힌다.

‘오늘 들은 말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문득 낮의 벽보가 떠오른다.

‘거짓말을 퍼뜨리지 맙시다.’

어떤 말이 거짓이고, 어떤 말이 진실일까. 누가 정할까.


밤이 깊어질수록 소리는 얇아진다. 창문이 바람에 가볍게 떤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한 번, 두 번. 그다음은 없다.

하린은 이불을 끌어당긴다. 눈을 감으면 낮의 군화 자국이 먼저 떠오른다. 그 옆에 또 하나의 자국이 놓인다. 간격이 같다. 그림자도 같다.

‘내일은 더 가까이 오겠지.’

입술이 마른다. 손이 등잔불 그림자를 더듬는다.

“괜찮을 거야.”

하린이 아주 작게 중얼거린다. 대답은, 바람 속으로 스며든다.


바람은 낮의 말들을 긁어모아 밤으로 옮긴다. 모인 말들은 소문이 되어 더 멀리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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