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바람이 전하는 속삭임

제주 3

by Bloom지연

1948년 봄, 제주.


아침, 하린이는 치맛자락을 툭툭 털고 고무신을 꾹꾹 눌러 신으며 집을 나선다. 골목길 끝에 수미 언니가 서 있다.

“빨리 와!”

수미 언니가 손을 흔든다. 그 옆에는 은지도 보인다. 오랜만에 함께 학교에 가는 길, 하린이의 발걸음이 가볍다. 세 아이는 손을 맞잡고 흙길을 콩콩 뛰어간다. 잠시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명랑한 아침이 이어진다.


하지만 교문 앞에 다다르자 분위기가 달라진다. 군인들이 서 있다. 거친 손길이 아이들의 가방을 뒤적이며 책을 살핀다.

“오늘은 수업 없다. 집에 돌아가라.”

날 선 목소리가 떨어진다.

“왜요? 오늘은 일요일도 아닌데요.”

수미가 조심스럽게 묻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세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선다. 학교로 향하던 웃음은 금세 사라지고, 발걸음만 무겁게 이어진다.


돌아오는 길, 길모퉁이마다 군인들이 총을 멘 채 담배를 피우고 서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시선을 내리깔고, 담장 옆의 돌멩이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걸음을 재촉한다. 수미 언니, 하린이와 은지는 손을 놓고 각자의 집으로 흩어진다. 골목길에 남은 발자국 소리만 쓸쓸하다.


집에 도착하자 어멍이 묻는다.

“오늘 학교는?”

“군인들이 수업 없대. 그냥 집에 가라 했어.”

어멍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제 학교도 못 가는구나…”

“왜 못 가는데? 내 친구 집엔 놀러 가도 돼?”

하린이가 기어이 묻는다.

“몰라! 나도 모르겠다니까. 집에서 조용히 있어. 괜히 나다니지 마. “

어멍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인다. 하지만 눈가에는 걱정이 드리워져 있다. 속으로는 남편의 행방을 떠올리며 애써 삼킨다.


저녁이 되자 밥상 위에 톳된장국과 자리젓이 올랐다. 곁에는 호박볶음과 감자조림이 소박하게 놓였다. 엄마는 젓가락으로 자리젓 한 점을 집어 하린이 그릇에 올려준다.

할멍이 아빠 쪽을 보며 중얼거린다.

“괜히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마라. 누구 말도 믿지 말고, 집에만 가만히 있어라.”

아빠가 낮은 목소리로 맞받는다.

“그렇게만 해서 뭐가 나아지겠습니까. 나라가 이렇게 되면 안 되지 않습니까.”

하린이는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긴장된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젓가락만 내려놓는다.

“밥이나 먹읍시다.”

어멍이 말을 자른다. 그러면서도 하린이를 향해 단호히 말한다.

“밖에 나가서 이런 얘기 절대 하지 마라. 입 단속해야 된다.”

할머니가 그릇을 앞으로 당기며 중얼거리듯 말한다.

“말 조심해야 한다. 귀가 많아, 벽에도 귀가 있다.”

하린이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지만, 목소리가 낮아진 어른들의 표정이 무섭다.


밤이 깊어 간다. 등불은 켜지 않는다. 군인들이 불빛을 단속한다는 소문 때문이다. 하린이는 글자 연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오늘따라 달빛마저 어두워 책위의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

이불을 덮고 누웠지만 눈은 쉽게 감기지 않는다. 귓가에는 파도소리가 깊게 울린다. 그 파도는 단순한 물결 소리가 아니다. 바다 밑 어딘가에서 누군가 낮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하린이는 숨을 고르며 귀를 막아본다. 하지만 소리는 더 또렷하게 파고든다.


오늘 밤, 파도 소리는 유난히 크다. 하린이는 이불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끝내 잠들지 못한다. 귀 속으로 밀려드는 파도소리가 점점 말소리처럼 변해간다. 바다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만 같다.


멀리, 다른 하늘 아래에서도 같은 목소리가 번져나가고 있다. 그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다른 이의 가슴에도 똑같은 울림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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