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
1980년 5월, 광주.
운림중학교 복도에 종소리가 울린다. 땡, 땡, 땡. 수업 종료를 알리는 소리인데도, 아이들의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없다. 가방끈을 고쳐 메며 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다. 교실 문이 열리고 닫히며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지만, 목소리는 낮다. 웃음소리 대신 신발 밑창이 마룻바닥을 스치는 소리만 남는다.
민수는 교실 뒤편에서 천천히 나온다. 곧 철수가 옆으로 다가온다.
“야, 오늘도 수업 짧네.”
민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 근데, 왠지 불안하지 않냐?”
철수는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흘끗 본다.
민수는 대답 대신 가방끈을 더 세게 움켜쥔다.
교문 앞. 두 명의 군인이 총을 멘 채 서 있다. 총구는 땅을 향해 있지만, 금방이라도 불을 뿜을 듯한 긴장감이 학생들을 옥죈다. 군복의 단추는 햇빛에 반짝이고, 군인들의 눈빛은 학생 하나하나를 훑는다.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들 앞을 조용히 지난다. 철수도, 민수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는다.
운림동 골목에 들어서자, 학교와 달리 사람 냄새가 묻어나는 풍경이 이어진다. 작은 상점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문구점 진열대에는 먼지가 쌓인 연필 꾸러미와 공책 더미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계산대에 앉은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부채질만 한다. 곧이어 빵집에서 갓 구운 곰보빵 냄새가 골목으로 흘러나온다. 유리 진열장에는 소보루빵과 단팥빵이 나란히 놓여 있고, 고소한 향이 문턱 밖까지 퍼진다. 평소 같으면 아이들이 줄을 섰을 자리지만 지금은 텅 비어 적막하다. 대로변 쪽으로 몇 걸음 더 가면 낮은 기와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마당마다 빨래가 햇살을 머금고 바람에 펄럭이고, 담장 위에는 분홍빛 채송화가 고개를 내민다. 한낮의 햇살은 화사하지만, 골목 안 공기는 묘하게 고요하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넓은 길이 나타난다. 전봇대마다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반쯤 찢겨 나간 것도, 빗물에 번져 글자가 사라진 것도 있다. 그러나 민수의 눈에 한 단어가 또렷이 들어온다.
’ 자유‘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지켜야 할 말인데, 왜인지 금기처럼 다가온다. 설명되지 않는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길모퉁이에는 군인 셋이 담배를 피우며 서 있다. 그중 한 명이 다 피운 담배를 바닥에 툭 튕겨내자, 지나가던 아저씨가 깜짝 놀라 발걸음을 재촉한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삼키며 그 옆을 스쳐 간다.
버스 정류장 앞에 다다르자, 낡은 철판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번호는 희미해져 알아보기 어렵다. 기다리던 버스가 덜컹거리며 멈춰 서자, 사람들은 말없이 줄을 선다. 민수와 철수도 조심스레 그 틈에 낀다.
버스 안은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다. 손잡이를 잡고 선 사람들 사이로 땀 냄새가 배어 나온다. 군데군데 앉은 군인들의 군복이 눈에 띈다. 군인 옆자리에 앉은 승객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창밖만 본다. 아이들은 창가 쪽 난간을 잡고 나란히 선다.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다가 큰 진동과 함께 덜컹거린다. 차창이 떨리고 창밖 풍경이 흔들린다. 문 닫힌 찻집, 굳은 표정의 상인들, 군인들의 차가운 시선. 버스 안에서 마른기침이 터지기라도 하면, 그 소리마저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그 사이로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가 창문 곁을 스쳐 지나간다. 아까와 같은 단어가 또 눈에 박힌다. 자유. 민수는 눈길을 떼려 해도 떼지 못한다.
“민수야, 오늘 형 집에 와 있대?”
철수가 묻는다.
“아니. 오늘 저녁쯤 들어올걸.”
“그래, 형 있으면 든든하겠다.”
민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잠시 대화가 끊기고 창밖으로 바람이 스친다.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버스는 굽은 길을 따라 흔들리며 달린다.
“야, 나 여기서 내려.”
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든다.
“내일 보자.”
“어, 조심해라.”
철수는 창가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작게 대답한다.
민수는 버스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발밑 흙먼지가 바람에 일어난다. 담장 너머에서는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듯한 기척이 스친다. 개 짖는 소리가 잠시 울리다 이내 멎는다. 골목의 공기는 낯설게 조용하다.
집 앞마당에 다다르자 엄마가 현관 앞 계단을 빗자루로 쓸고 있다.
“일찍 왔네?”
“응. 수업 없대.”
“밖에 오래 있지 마라.”
짧은 대화는 거기서 끝난다.
엄마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쓸던 자리를 정리한다. 한쪽에는 시장에서 막 사온 듯한 무와 배추가 담긴 장바구니가 곁에 놓여있다. 마당에는 햇살을 머금은 빨래가 바람에 흔들린다. 공기 속에는 흙먼지와 풋내가 어우러져 낮의 정적을 더욱 짙게 만든다.
민수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형과 함께 쓰는 작은 방. 낮은 책상 위엔 민수의 교과서와 낡은 연필이 어질러져 있고, 그 옆에는 형의 두꺼운 대학 노트가 포개져 있다. 그리고 오래된 라디오 하나가 놓여 있다.
방 안은 적막하다. 형이 없는 공기가 묘하게 무겁다. 책상 한쪽에 놓인 형의 펜은 잉크 자국을 남긴 채 멈춰 있다. 창문 틈으로 바람이 스며들며 낡은 커튼을 흔든다. 민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창문을 바라본다.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겹이 번져오는 듯하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는데도 집 안은 벌써 어둑하다.
민수는 창문 틈새로 흘러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멀리서 울림처럼 번져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밤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어둠이 깃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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