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2
1980년 5월, 광주
문을 닫는 소리가 집안에 은근히 퍼진다. 민수는 형과 함께 쓰는 방에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는다. 오후 햇빛이 벽에 길게 걸려 있다. 책상 위에는 공책과 볼펜, 접힌 전단지가 어수선하게 놓여 있다. 민수는 손끝으로 공책을 정리하다가 문득 멈춘다. 글자 몇 줄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말들. 민수는 한 글자씩 더듬듯 읽는다. 입안이 바싹 마른다.
형의 침대는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 베개 위에는 머리카락 몇 가닥만이 남아 있다. 침대 위에는 구겨진 셔츠 한 장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다. 같은 방인데 오늘은 민수에게 낯설게 느껴진다. 익숙한 냄새가 약간 바뀐 것 같다. 창문을 조금 열자 축축한 바람 냄새가 희미하게 스며든다.
민수가 방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묻는다.
“엄마, 뭐 해요?”
엄마가 바구니를 들고 지나간다.
“오늘 저녁은 콩나물국 끓여야겠다. 시원하게.”
“좋다! 빨리 먹고 싶다. 엄마, 오늘 형도 같이 먹을까?”
엄마는 잠시 말이 없다. 마당을 보며 조용히 대답한다.
“그러면 좋지…”
짧은 대화가 방 안에 남는다. 민수는 괜히 의자에 앉아 발끝을 흔든다. 엄마의 말끝이 가볍게 흔들린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그때 대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발소리가 빠르게 마당을 건넌다. 문이 툭 열리며 형이 들어온다. 숨이 약간 가쁘다.
“형.”
민수가 부르자 형은 고개만 끄덕인다. 책상 서랍을 열어 공책 하나를 꺼낸다. 모서리가 닳은 공책이다.
“오늘 우리 학교는 수업 없었어. 형 학교는?”
“있었지. 근데… 별거 없어.”
형의 말은 짧게 끊겼다.
“형, 요즘 뭐 하고 다녀? 나도 좀…“
형이 민수의 말을 끊는다.
“민수야, 오늘은 그냥 집에 있어. 알겠지?”
형의 시선이 잠깐 책상 위 종이에 머물다 다시 돌아온다. 더 길어지지 않는다. 그는 공책을 품에 넣고 몸을 돌린다.
“이따 조금만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인데 또 어디 가는 거야?”
마당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금방 들어올게요.”
짧게 내뱉은 대답과 함께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곧 대문이 덜컥 닫힌다. 집 안의 공기가 비워진 듯하다.
민수는 창가에 서서 마당을 내려다본다. 엄마가 콩나물을 씻는다. 물소리와 함께 껍질이 떠오른다. 그 손놀림을 잠깐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아 공책을 펼친다. 빈 칸이 눈에 들어온다. 말하지 않은 문장들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진다.
멀리서 트럭 엔진 소리가 윙윙 울린다. 일정한 간격의 군홧발이 겹쳐 들린다. 그때마다 방의 공기가 가라앉는다. 민수는 창문을 닫을까 하다가 멈춘다. 공책 모서리를 쓰다듬는 손끝이 심장 박자와 맞물린다.
공기는 무겁게 고여 있다. 그렇게 하루의 빛이 서서히 기울어 저녁이 된다. 집 안의 불빛이 하나 둘 꺼지고 복도 등만 남는다. 민수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창문을 바라본다. 유리는 캔버스가 되고, 어둠은 그 위에 검은 물감으로 번져나간다. 그 즈음에서야 달빛이 스며든다.창문 틈 천을 통과해 길고 가늘게 방을 가른다. 책상 다리를 타고 공책 가장자리에 닿는다.
민수는 숨을 죽인다. 빛은 움직이지 않는데 방 전체가 느리게 흔들린다. 낮과 저녁의 자리를 달빛 하나가 잇는 듯하다. 멀리서 군홧발이 다시 들린다. 유리창이 얇게 떨린다. 손바닥으로 창문을 붙잡는 순간, 민수의 심장도 같은 박자로 떨린다. 놓으면 더 크게 울릴 것 같아 그대로 붙잡고만 있다. 달빛은 공책의 빈 칸을 더 환하게 밀어 올린다. 형의 글씨와 글씨 사이, 말하지 않은 말들이 어둠 속에서 드러난다. 그 글씨가 민수에게로 옮겨 붙는 듯하다. 알 수 없는 떨림이 배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엄마가 방문 앞을 지나간다. 멈추지 않고 조용히 스친다. 민수는 부르지 않는다. 달빛이 공책과 민수의 얼굴, 그리고 빈 자리까지 가만히 비춘다. 골목 끝에서 개가 두 번 짖는다. 잠깐, 아무 소리도 없다. 곧 군홧발이 다시 들려온다. 민수는 셈을 하다 멈춘다. 셈이 끝났을 때 무엇이 시작될지 몰라서.
달빛이 아주 조금 흔들린다. 구름이 지나간 건지, 민수의 숨결이 닿은 건지 알 수 없다. 그 흔들림이 멈추자 방 안 공기가 더 선명해진다. 민수는 침대 끝머리에 앉아 이불을 무릎까지 끌어올린다. 형이 아무 일 없다는 표정으로 들어오는 상상을 한다. 그 상상은 짧게 끝난다.
공책의 글씨는 그대로지만, 달빛이 글씨마다 다른 울림을 입힌다. 민수는 공책을 덮지 않는다. 덮으면 오늘이 닫혀버릴 것 같아서. 집은 고요하다. 두꺼운 고요 속에서, 민수는 창문을 바라본다. 달빛은 어둠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그 어둠을 드러낸다. 숨을 길게 들이마신다. 숨이 멈춘 듯 고여있다. 잠깐, 아무 일도 없다.
그리고 그 잠깐이 길어진다.
길어진 순간, 민수는 곧 무언가가 문턱을 넘는 소리를 듣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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