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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제이 Sep 27. 2021

벌써 2년

마흔 살, 무모한 도전은 진행 중.

목요일 아침은 첫째 유치원에 체육시간이 있는 날이라 운동복을 입혀 보내야 하는데, 여느 아침처럼 한참의 실랑이 끝에 겨우 아빠 차에 실려 내보내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아차. 또 깜빡했네. 첫째는 또 뿌루퉁한 얼굴로 돌아오겠구나.'


아직 표현력이 떨어지는 아이는 감정에는 충실하지만, 그 원인 분석이 힘들어서 어른(나와 남편)이 항상 행간을 읽어줘야 한다. 남편에 비교할 때, 나는 원인 분석에는 강하지만 감정 표출에 서툰 형이라 (우리 세대가 다 그런가요. 우리나라가 유독 그런가요), 만 4살과 둘이 같이 있다 보면 극도의 커뮤니케이션 에러를 경험한다. 모처럼 아이 얼굴을 마주 보고 진중히 얘기라도 해볼라치면, 갑자기 회색 콘크리트 벽이 테트리스 게임에서 떨어지는 제일 길쭉한 도형처럼, 나와 아이 사이에 차곡차곡 내려와 쌓이는 느낌이 들곤 한다.        


첫째의 운동복을 잊은 나에게 어김없이 맘 길트는 찾아왔고, 마음이 조금 불편한 채로 서둘러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내 랩탑 주변에는 첫째가 아침에 만든 파이터 젯 레고 블록 (실은 이걸 막 돌 지난 둘째가 와서 집어던지는 바람에 우리 집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지금은 날개가 없지만 이대로 둬야 한다. 첫째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이걸 원래 대로 복귀하겠다고 찾을 것이기 때문에 )과 옆집 누나한테 얻은 요즘 핫하다는 포핏들 (Poppits), 문은 어디론가 다 날아가버린 초록 카봇, 그리고 둘째가 먹다 만 뭉개질 대로 뭉개질 바나나가 벌써 몇몇 날파리들을 유인하였다. 나는 그것들을 미처 치울 새 없이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4시까지 마감인 국가 지원 사업 지원서를 마무리해야 한다. 한국어로 이렇게 길게는 처음 써보는 사업 제안서라라서 잘 써지지가 않는다. 영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외국계 기업에서만 주구장창 14년을 다녔던 나에게는 이런 한국으로 문서화하는 업무가 정말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도 이렇게 써지지 않을 때는 마감에 촉박해서 쓰는 게 제일이야-라고 위로 아닌 위로 겸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자판을 두들기는 내내 위챗 단체방에서 다음 달에 예정인 중국 베이징, 상해에서 열리는 제품 박람회 관련 톡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우리 회사 제품 샘플도 통관을 잘 거쳐 도착했다는 톡을 보고 쓰윽 웃었다.


'아, 중국 바이어 하나만 잡으면 우리 제품 바로 다시 찍을 수 있을 텐데. 제발 잘 되길.'


여고 동창생 쑴이랑 같이 덜컥 회사를 차리고, 월경 용품을 만들겠다고 제조사들을 찾아 한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닌 지도 이제 2년이 되었다.


처음은 언제나 설렘으로 기억된다.

첫사랑, 첫 키스, 첫날밤, 첫 직장, 첫 월급, 첫 임신, 첫 출산...... 그리고 첫 법인 설립까지.

하지만 그 첫 순간이 막상 현재 진행형일 때는 오히려 불안하고 조급하다고 해야 옳은 것 같다. 추억은 미화되는 거니깐. 엄마가 처음인 나, 그리고 창업이 처음인 나는 지난 2년의 시간이 다이내믹했고, 들뜨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고, 조급할 때고 있었고, 까막 득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정말 익사이팅하기도 했다. 이렇게 미친년처럼 감정의 굴곡이 깊고 큰 하루하루를 살아냈고,  물론 오늘도 또 다른 도전의 하루이다.

 

그리고 나에게 온전히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6시간이다. 첫째가 유치원에 가는 아침 8시부터 픽업을 가야 하는 오후 2시까지. 그동안만은 나는 세상 최고로 효율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는 밀린 문자를 읽거나 보낸다. 자가운전을 꺼리는 것도 지하철에서는 이메일이나 문자로 업무를 볼 수 있기 때문인데, 버스나 택시 안에서는 화면만 보면 멀미가 올라와서 그것도 피해야 한다.


오늘은 컴퓨터 앞에서 꼬박 6시간을 아침과 점심 모두 영양바를 뜷어먹으며 네 잔의 커피를 들이켰고, 오타 체크할 시간 없이 35장의 제안서를 완성했다. 나 혼자 쓰고 읽고 또 쓰고 또 읽어서 비판적인 시각이 불가능해진 나는 마지막 프루핑 리딩을 하면서 심지어 제법 괜찮은 제안서네-라고 생각했다.


' 아 벌써 픽업 시간이네.'

아침에 양치질을 하지 못했다는 게 기억났지만, 까짓 거 마스크 쓰면 몰라. 하면서 헬멧과 마스크를 집어 집을 나섰다. 다른 반 친구들 다 가버리고 태오가 마지막으로 혼자 남아 기다리지 않게 가야지. 초인의 힘으로 무지막지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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