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적'이다라는 말을 소극적이고 조용하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하지만, 실제 내향적은 안으로 향하는 것이다. 무엇이 안으로 향하는가? 나의 에너지도 생각도 마음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내향적'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외향적이라면 자신 내면이 아닌 외부 세상과 사람들, 환경으로 향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내향적, 외향적도 사실 상대적 개념이라서 결국 정도의 차이, 스펙트럼의 일부이다.
I(내향)이 강하냐, E(외향)이 강하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뿐,
내향이다, 외향이다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내향적 성향이 꽤나 강한 사람이다.
아마 1을 내향, 10을 외향으로 본다면 아마 한 3 정도 눈금에 속하지 않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자아가 꽤나 센 사람이다.
도를 깨달은 자는 자신을 마지막에 둠으로써 경쟁에서 벗어나고, 에고를 무시함으로써 자기 몸을 보존한다.
사사로움 없이 행함으로써 그는 자아를 실현하는 게 아니겠는가.
- 길을 찾는 책 도덕경, 켄 리우 p. 54.
그래서인지 '에고를 무시함으로써 자기 몸을 보존한다'는 구절에 끌린다. 여기서의 '에고'가 자아라면, 자아를 무시해야 도를 깨닫는 것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으로도 읽힌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우리가 현명하고 덕이 있고 도를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운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에고'를 무시한다는 것이 깨달음의 지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남의 목소리에 휘둘린다고 생각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어디서 온 지도 알 수 없는 스스로를 비판하고 판단하는 목소리이다.
자신을 마지막에 두고, 에고를 무시하고, 사사롭지 않은 것.
다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노자의 말도 도덕경도 어려운 이유이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야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말인지 아는 그 느낌이다.
책을 읽기가 점점 어렵다.
해설이 있는 구절도 어렵고, 해설이 없는 구절은 더더욱 어렵다.
도가 쉬우면 도가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몇 번 더 읊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