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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치 Sep 07. 2024

성추행 그 다음

주변인에게 알리기, 망각

 애인은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잘 시간이 지나 잠에 취한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날 기다려준 애인에게 사과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속에서 많은 고민이 스쳐갔다. 성범죄 피해자랑 결혼하는 남자가 있겠냐는 둥 뼛속까지 가부장적인 이들에게 들은 이야기, 2차에 간 것을 이야기하지 못한 나의 실수. 내가 잘못한 것 같은 점들을 끝없이 나열해보았다. 무엇보다 애인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하겠어서 겁이 났다. 그러다 문득 고민하고 있는 스스로가 바보 같아지며, 이야기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야기를 들은 후 애인의 반응과 선택은 그의 몫이니까 그건 내가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애인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 성추행당한 것 같아. 조심스럽고 이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던 것 같다. 그 후로는 애인이 묻는 말에 더듬더듬 대답했다. 처음엔 내가 두 번째 술자리에 간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애인이 화가 났다. 나 같아도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울음이 터지니까 멈추지가 않았다. 현실감 없던 일을 말로 꺼내자 그제야 생생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애인은 나를 달래주며 걱정 어린 말을 뱉었다. 속상해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더 눈물이 났다.

 여성인 친구와 전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햇살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잘 시간이라 그런지 받지 않았다. 문자를 남기고, 그 시간에도 깨어있을 만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욕을 뱉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전화를 마치고 이번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앞에서 우는 건 중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라 그런지 아빠는 전화 내내 심각했다. 나를 달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찾아보자는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다시 애인에게 전화를 걸자 애인은 집에서 나왔다며, 해가 뜨면 첫차를 타고 내 집으로 오겠다고 이야기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를 말렸지만 혼자두기 걱정된다며, 이건 자신의 선택이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씻어야 했다. 여전히 푸주의 침냄새가 나는 것 같아 양치질만 세 번을 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냄새가 배어있는 기분이었다. 속은 여전히 울렁이고 잠은 오지 않았다. 씻고 나와 인터넷에 이런저런 검색을 했다. '성추행 당했을 때', '성추행 피해자 대응'. 내가 원하던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성범죄 가해자를 위한 양형, 합의 방법을 설명하는 변호사들의 콘텐츠가 대부분이었다.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푸주도 이런 걸 수십 번 검색해 보겠지, 어떻게 하면 가장 유리할지 끝없이 따져보겠지


  잠에 들지 못하는 나를 위해 애인은 계속해서 영상통화를 해주었다. 그러다 눈을 잠깐 감았다 뜨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4시간 정도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뜨니 어제의 기억이 흐릿해졌다. 속 쓰리고 토할 것 같은 숙취가 더 괴로웠다. 시체처럼 누워있다가 햇살이의 부재중을 보고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생각하려고 하면 구체적으로 떠오르기는 했다. 울렁이는 속을 잠재우고자 라면을 한 봉지 끓여 먹었다.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했다. 그러다 나한테 진짜 있었던 일이 맞나? 헷갈리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니 더욱 꿈을 꾼 것 같았다. 아주 역겨운 꿈.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튜브를 보고, 거북이 밥을 챙겼다. 이상한 망각이었다.

 기차에서 잠들었다가 내려야 할 역을 놓친 애인은 도착예정시간보다 3시간이 지나 우리 집에 왔다. 고생한 모습에 미안한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애인이 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같이 밥을 먹고 집에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애인과 스킨십을 하려 하면 나도 모르게 거부 반응이 나왔다. 푸주와 유사하게 입술이 닿거나 볼이 닿으면, 그리고 손이 닿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불쾌함이 몸을 채웠다. 또다시 어제 있었던 일이 피부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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