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원고는 『문학의 오늘』2018년 봄호(통권 제26호) 40~50쪽에 실렸습니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s)에서 화두로 제시되었던 ‘제4차 산업 혁명(The Forth Industrial Revolution)’이라는 단어가 한동안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이 용어의 실체는 다양한 층위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기에 섣불리 의미를 단정하기 어렵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계속 확장될 것 같았던 유령은 일 년 여 만에 표면적으로는 이슈화가 멈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과는 다르게,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추동될 미래의 모습들이 지금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모습을 하고 우리와 직면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를 제외하더라도 도래하고 있는 시대의 모습은 이전시대의 부분적이고 거점기술 중심적이었던 것과는 다르게 다양한 기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초연결(hyperconnectivity)과 초지능(superintelligence)의 형태를 지향할 것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한 세상의 변화 범위와 속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될 것 역시 자명하다.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추동할 것이라 여겨지는 기술들은 각각 긴밀하게 상호작용 하면서 새로운 구조들을 형성해 나갈 것이다.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과 물리적 저장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정보 집적 시스템인 클라우드(Cloud)는 빅 데이터(Big Data)의 구축을 가시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 동안 급속도록 발전한 모바일(Mobile) 기반의 디바이스들은 기술과 기술 뿐 만 아니라 존재와 존재를 연결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서 사람의 역할변화를 요구하게 될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발달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론들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여러 우려의 목소리들이 언급한 것처럼 사회의 구성주체로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재정의를 필연적으로 요구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막연하게 인간의 존엄성의 위기나,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하는 세상이라고 도식적으로 판단되는 그런 구조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효용이 없다. 좀 더 복잡하고,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질문해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질문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왜곡되고 과잉된 의미부여와 협소한 시각으로 오독하는 것들을 경계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의 도래에 대해 예견하고 그로 인해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들에 대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은 그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기술적인 영역이나,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 걸치는 문제들을 아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과 인간이 연결되던 이전의 변화와는 다르게, 기술과 인간의 명확한 상호구분이 모호해진 상태에서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는 사회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이는 그 안에서 존재하는 방식, 존재를 규정하는 방법론 역시 변화를 요구받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새롭게 변화될 시대는 단순히 기술의 변화양태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존재들이 이전과 다른 방법을 가지고 존재하는 시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존재의 방법 중 언어, 혹은 목소리를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다층화·다양화될 언어들의 문제는 생각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를 가진다는 것, 그 언어로 목소리를 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은 그동안 인간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시대의 종식을 목전에 두고 있다. 특히 발달한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사회의 인간은 더 이상 창조자의 위치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 혹은 기술로 인해 만들어진 오브제와 같은 층위에서 동등한 객체로 존재하게 된다.
도래할 세상은 이런 층위에서 정의된다. 단순히 주변의 풍경이나 활용할 수 있는 물품의 기능들이 좋아지는 것을 넘어서, 세계를 축조하는 방법과 그 안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방법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세계가 본격화 된다면 우리들은 그동안 부여했던 의미들의 상당 부분들을 잃어버릴 것이고, 새로운 의미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고, 이전에도 계속되어왔던 부분이긴 하다. 다만 그 변화의 마지노선이라 여겨졌던 영역들이 무너지고 있고, 종국엔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데서 구별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빨리 도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화예술의 영역 역시 큰 변화를 요구받게 될 것이다. 기술의 발달과 사회 구조의 변혁에도 유지되었던 것들까지도 이전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한 생경한 영역으로의 진입을 종용받게 될 것이다.
2016년 한국에서 알파고(AlphaGo)와의 대국으로 인해 촉발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일본에서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쓴 소설이 권위 있는 문학상인 호시 신이치상(星新一賞)의 1차 예심을 통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둑의 경우엔 기보(棋譜)와 같은 네뉴얼과 이를 근간으로 파생된 법칙이 존재한다. 그러기 때문에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의 발달된 형태인 딥러닝(Deep Learning) 알고리즘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기보를 습득한 알파고는 인간과의 대국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알파고가 보여주었던 프로기사로서의 능숙함과 작가로서의 인공지능이 스스로 작품을 생산해 인간들의 미학적 기준을 통과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다. 인간들이 문화예술 작품에 부여하는 미학적인 가치의 문제와 존재의 목소리로서 글쓰기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유사한 기술이 적용된 이 두 가지 결과는 서로 다른 의미들에 닿는다.
우선 문화예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보조하기 위해 발명된 로봇과 컴퓨터들은 이전까지는 철저하게 인간의 물리적인 행위들을 진보시키는 범위 내에서 발달 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발명품들이 대체하지 못할 영역으로 오랫동안 여겨지던 곳이 바로 문화예술 영역이었다. 예술작품에 부여되었던 아우라는 대량생산 시대와 예술의 상품화 시대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살아남았다. 이렇게 예술작품에 최소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근거는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의 가치와 비롯된 숭고함 덕분이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를 위한 예술이라는 팝아트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분하고 가치를 부여하려 했다. 그 결과 앤디 워홀(Andy Warhol)이라는 권위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결국에는 자본에 의한 아우라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변용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인간이 예술작품을 창작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인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 놓은 개념들을 단기간에 습득하고 인간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영역의 기보들을 만들어 낸 것과 같은 현상들이 예술 영역에서 일어나지 않으란 법은 없다. 이미 향유의 개념보다는 소비재로서의 역할과 소유재로서의 가치로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에 의해 소비중심적인 의미를 형성하기 시작한 예술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needs)에 부합하는 요소들을 파악할 수 있는 기술적인 배경들은 이미 마련되었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언표가 기본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변화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술의 경우 미학적인 의미들을 구현하는 문제는 또 다른 영역이라 여겼기 때문에 직접적인 변화를 종용받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지만, 인공지능이 쓴 소설의 등장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의 탄생을 보여주는 것이다. 팝아트 시절 이전에 아우라를 부여할 수 있는 작가의 개념에 부합하지 못했던 워홀에게 거장의 프레임이 새롭게 부여된 것처럼,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빼어난 문체를 구사하며, 거대한 팬덤을 거느린 인공지능 작가에게 아우라를 부여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는 단순히 매체의 발달로 변화의 궤도를 형성하던 시대와는 다른 맥락을 요구한다. 종이에서 디스플레이로 소비의 형식이 바뀌고, 붓이나 펜을 사용해 손으로 쓰던(writing) 것에서 타자기의 등장 이후 키보드로 입력하는 것(typing)으로 변화하면서 만들어지던 생산 기조의 변화와는 또 다른 맥락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창작을 하는 주체의 다양화, 혹은 변화는 인류의 문화의 발달과 함께 해오던 문학의 정의를 전혀 다른 층위의 논의들을 요구한다. 그러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는 오히려 매체라는 형상(forme)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도 무용해 지고, 개체화되는 과정에서 정보(information)기 개념들이 더 중요한 의미를 형성하고 관계를 촉발시킨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에 발생할 문학의 형태, 좀 더 느슨하게 이야기해서 글쓰기는 어떤 의미들을 지니게 될까, 아니 근본적으로 그런 것들이 존재하게 될까.
막연하고 급진적인 것들에 대한 관념적 이야기를 피하더라도 아주 가까운 곳에 단서들이 존재하고 있다. 더 이상 형상으로 의미를 획득하고, 형상으로 주체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통해 의미를 획득하고 관계를 맺는 시대가 된다면, 기존의 주체와 형상들의 범위를 재정의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특히 한국 문학에서는 기존의 형상을 구축하는데 작동된 의미작용에서 배제된 낯선존재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게토화 되어있는 한국문학의 형상들이 필연적으로 정보로 치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보았을 때, 규정된 바깥에 존재하던 문학들과 글쓰기 방법론이 너무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근대 문학의 발달로부터 역사적인 시각으로 톺아보아도 딱지본 소설부터 통속문학이나 상업주의 문학, 대중문학,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장르문학과 최근에 이르러서는 웹소설까지, 그동안 명백하게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학이라는 의미작용에서 배제되어 왔던 요소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의미작용에서 배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개별적인 맥락을 가지고 발전해 왔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진지한 접근을 통해 연구되거나, 주류 비평의 언어로 규정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미진했고, 당연한 인과로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장(field)을 형성하지 조차 못한 채 소멸되어 버리거나 인식에서 소거당해 왔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등장과 소멸을 반복하면서도 계속해서 낯선 존재들로 치부되면서 명확한 의미를 형성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 문학의 범주를 벗어나면 오히려 문화권을 형성하는 의미작용에서 활발하게 유용되던 요소이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존재 혹은 방법론이라 인식해 소비하는 것은 적확하지 않다. 이전까지의 시도들이 이들을 새로운 방법론이나 기회의 일환으로만 인식하고 접근했기 때문에, 오히려 대상화된 객체로서의 거리감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문학은 새로운 글쓰기의 방법론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에 함몰될 것이 아니라 의미작용에서 배제해왔던 것들에 대한 인식의 궤도를 우선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문학, 혹은 글쓰기에 대응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이 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새로운 의미작용에서의 주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배제해 왔던 영역과 주체의 역전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고, 전혀 다른 의미들이 주도할 수도 있을 것이며, 주체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기존의 한국 문학에서 새로운 것이라 명명하는 것들의 상당부분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사실 외연을 확장한다거나, 새로운 영토들을 모색하는 것은 제국주의 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존재하고 있던 대륙에 신대륙(新大陸)이라고 명명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인지와 사고의 기준이 유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식의 오류로 인해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그곳의 토착민들 인디언이라 명명했던 것은 이러한 인식의 오류를 반증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오류 문제 뿐 만 아니라, 중심을 정하고 그 주변을 끊임없이 대상화하면서 의미를 만들려는 시도는 초연결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획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대안으로 시몽동(Gilbert Simondon)이 정의한 형상화(in-form-ation)의 과정은 정보의 소통, 불일치 한 실재들이 관계를 지으면서 상호작용하는 것은 의미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보 간의 위계나 헤게모니와 같은 기존 개념들의 재정의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상호작용은 동등한 위치를 획득한 개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이러한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정보가 형상화되어 의미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대입하려고 했을 때, 한국 문학은 새로운 글쓰기의 방법론이나 새로운 문학의 영토들을 찾는 것을 모색하기 이전에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필요가 있다. 게토의 바깥에는 각자의 계보를 가지고 발전해오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을 너무 간단하게 새롭다고 여길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영역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부분으로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 대중문학에서 2000년대 이후 장르문학이라는 언표로 변화하면서 계보화와 현지화를 통해 고유한 의미의 획득이 명확해진 문학의 영역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SF와 추리, 로맨스와 같은 장르들은 한국의 근대 문학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함께 해왔고, 이후로 계속해서 한국 사회의 고유한 이야기 방법론으로 변형되면서 지금까지 발전을 지속해 왔기 때문에 담론의 본격화를 위한 제반들이 확보되어 있는 상태다.
그 중에서도 SF의 경우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장르 초창기의 대표작들을 번안하면서 시작되어 1990년대 PC 통신 시대를 거치면서 장르의 현지화가 진행되었다. 또한 1970년대 이후로 중국에서부터 한국으로 유입된 장르인 무협(武俠) 역시 1990년대 이후로 현지화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무협과는 다른 궤도로의 변화양상을 형성하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들과 같이 환상(fantasy)를 기반으로 하는 장르들은 1990년대 한국 문학에서 발견되었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논의들의 양태에서 견지하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PC 통신 시기 이후의 SF와 판타지, 무협의 파생 장르들에서 계속해서 이야기 오고 있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담론의 장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전 세계적인 판타지의 열풍이 확산되었을 때, 서양이나 일본의 콘텐츠 뿐만 아니라 1980년대부터 발전을 거듭해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온 한국의 판타지 작품들 역시 존재했다. 이는 다양해진 이야기 환경과 맞물리면서 오히려 한국의 전통적인 이야기 요소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재창조해 소비시키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추리물과 같은 경우에도 고대소설과의 연관성을 제외하더라도 일제강점기 김내성의 작품부터 장르의 시작을 정의할 수 있다. 김내성은 특히 일본에서 데뷔를 해서 추리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에게 사사받고 일본 내 활동을 하다가 귀국했던 인물이다. 물론 탐정 제도를 허용하지 않은 등의 사회적인 제반사항 문제들로 김내성 이후의 한국의 추리서사는 탐정소설의 영역들을 제외한 채 발전하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한국만의 계보를 지니고 발전해 온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러한 계보가 존재했기 때문에 1970년대 이후 홍콩 느와르와의 결합을 통해 한국만의 독특한 미스테리·스릴러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나타나는 현재가 가능했던 것이다. 인터넷이 발달했던 시절에 등장했던 인터넷 소설의 이야기 방식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팬덤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 유용하던 글쓰기 방식들이 매체의 발달로 인해 오픈소스의 형태로 공개된 형태로 규정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 이야기 영토에 존재하고 있는 낯선 존재들은 그동안 의미작용에서 배제되었을 뿐, 미지의 존재이라고 할 수도 없다. 특히 글쓰기의 방법론 측면에서 보았을 때 장르들이 가지고 있던 모달리티(modality)들은 결코 낯선 것들이라 할 수 없다.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사건을 만들고 그 안에서 논리적인 타당성을 세워 핍진성을 확보하는 것은 단순히 추리소설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없다. 로맨스 소설에서 작동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의 설정과 관계의 진행과 발전에 몰입하는 형태는 사실 모든 서사에서 유용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실재하지 않는 세계들을 상상하여 구축하고, 그 안에서 환상이 제공하는 현실의 전복성이나 현실의 이면에 대한 통찰을 다변화하고 확장하는 것은 기존의 한국 문학에서 다소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변화가 가속화된 사회, 그리고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문화에서 기술의 발달과 SF 텍스트들이 서로 예언적이고 선험적인 경험들을 상호교환하면서 발전해 왔으며, 장르의 발달 과정에서 기술의 발달로 인해 도래할 사회의 존재 방식에 대한 사고실험이 의미를 형성했던 것은 한국 문학의 영역에서만 낯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새로운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새로운 것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한국 문학의 인식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를 획득하기 어렵다.
결국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한국 문학이라는 기존의 중심을 기반으로 하는 가능성의 타진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미래에 문학의 의미에 대해 전방위적이고 전위적으로 사고실험을 감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현재 한국의 문화예술 내에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정보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시대의 담론들과의 거리감이 생경한 것에 비해, 이미 2013년 이후로 1990년대에 인터넷에서 시작되었던 소설 쓰기와 읽기의 영역은 모바일 다바이스를 근간으로 하는 웹소설로의 변화가 가속화 되기 시작했다. 웹소설의 영역에서는 기존의 장르문학이라 일컬어졌던 정보들이 더 이상 하나의 이야기 단위로 존재하지 않고 분화되고 분유되어 데이터베이스(data base)로 소비된다. 문장의 변화, 이야기 구조의 변화,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형태의 변화를 지나 문자형태의 변화와 조어의 생성은 이전의 은어와는 또 다른 확장성을 가지면서 파생된다. 근자에 일어나는 급식체와 야민정음의 현상들이 사회전반으로 유용되는 속도를 보면 이미 이러한 변화들이 소수의 마니아 집단들에서 발생하는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상들에 접근할 언어들이 현저히 부족하다.
새로운 시대의 변화가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층위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그것들에 대해 무리한 의미부여를 감행하는 것보다는 현재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초연결 사회에서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 정보간의 상호연관성이라고 규정했을 때, 우리들은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들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새로운 글쓰기의 방법이나 새로운 문학의 형태와 같은 담론들은 우리가 발명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해 왔던 것들에게서 나타날 것이다. 한국의 문화예술은 그만큼 다양한 모습들로 발달해 왔고, 그러한 자산들을 확보하고 있다. 다만 그것들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영토 혹은 새로운 방법론의 발견이라 너무 쉽게 인식하고 존재와 모달리티들에 대한 고민 없이 기존의 인식들을 덧씌워 아무렇지도 않게 인디언이라고 명명해 버리는 것은 계속해서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