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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자의 시대, 언어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고대신문> 1867(2019.1.28)

by 이지용

새로운 세대의 특징을 지칭하던 ‘영상세대’라는 말도 20세기 말엽에 등장했던 것이다. 영상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각매체라는 의미는 현세대의 매체 소비 양상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말이다. 지금은 이미지를 파편화하여 재맥락화하고 재의미화하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의미들을 형성하는 작업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세상이다. 특히 매체 소비 변화 양상을 주도하고 있는 모바일 디바이스는 이전까지의 매체가 가지고 있던 특징들과 다른 방향으로 우리의 인지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가장 큰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던 문자에 대한 위상 변화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인지 방식(embodied cognition)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인지 방식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대표적인 예는 몇 년 전부터 급식체와 더불어 인터넷 상에서 회자되었던 ‘야민정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던 야민정음은, 그전까지의 단순한 줄임말이나 관계망 내에서만 협소하게 소비되던 신조어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이 흥미롭다. 야민정음은 문자의 기표(signifiant)들을 그저 이미지로 인지하고, 기의(signifié)를 유지한 채 새롭게 재맥락화하는 방식을 취했다. 게다가 처음 시작은 착시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것을 보았을 때, 기존의 문자 인지 방식에 대한 정형성을 부정하고, 비틀어서 유희하는 행위였다고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다.


철학자들은 언어가 세계를 구성한다고 이야기해 왔다. 그만큼 언어가 가지고 있는 힘은 크고, 그러한 언어의 힘을 구체화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졌던 것은 문자였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기의를 담은 엄정한 세계인 기표에 대한 위엄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를 구성하는 언어에 문자가 제일 앞에 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이미지와 구술 언어가 기술 발달과 더불어 우리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 형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발달하는 음성인식 시스템들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하고 있는 IoT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지금 비문자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문자는 이제 언어를 구성하는 콘텐츠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실 문자를 인지하는 방식의 변화는 현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인식을 기민하게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신조어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방법론들을 우리가 단순히 언어의 파괴라고 재단해 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대게의 신조어들이 은어로 발생하는 것을 보면, 신조어가 가지고 있는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다. 신조어들은 언어로 대표되는 기존의 가치들로부터의 은폐와 전복을 꿈꾼다. 의미를 은폐하는 은어의 형태로 발현되는 것은 그것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은폐와 전복은 기존의 가치들에 대한 부정이자 재의미화를 추구하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한글의 오염이나 파괴라는 의미를 덧씌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그저 헤게모니를 휘둘러 현상들을 의미작용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에서 그칠 뿐이다. 게다가 야민정음의 경우엔 자음과 모음의 시각적 축조성을 가지고 있는 표음문자인 한글이라는 문자가 기존의 법칙성을 조금 비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한글 자체가 파괴된 것이 아니라, 현대 한글 맞춤법이 부정당한 것뿐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존의 가치에 대한 도식적인 판단들은 다소 의미가 없다. 신조어들은 그러한 판단들로부터 벗어나 유토피아까지를 지향할 수 없더라도 그들만의 의미들을 만들어내고 공유하고픈 일종의 헤테로토피아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글은 오히려 이러한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행위들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주고 있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문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는 민족성과 전통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독립된 문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의미를 재생산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세종머앟께서는 작금의 야민정음 현상을 보면서 롬곡을 흘리서나 괴꺼솟 하시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발명품의 넓은 효용력에 만족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조어가 우리의 현대 맞춤법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가를 골몰하고 경계하는 것보다, 그것들이 어떤 집단에서 어떤 의미와 욕망들을 은폐하면서 탄생했는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것은 문자 중심의 헤게모니를 걷어내고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파편화되고 있는 이 시대의 새로운 비문자적 언어들에 대한 진지한 정체 밝히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파편화된 언어 안에 들어가 있는 공동체의 다양한 인원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포용하기 위한 시작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고대신문> 1867(2019.1.28) 9면(문화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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