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486호 #대세는 게임소설2
‘게임소설’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장르의 개념에 대한 명확한 규정들이 아직 나와 있지 않지만 거칠게 정의하면 게임소설은 말 그대로 게임을 활용한 소설의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웹소설 플랫폼에서는 판타지의 하위 장르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이 이러한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게임 서사나 이야기(story), 게임성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인 가치와 같은 원론적이게 보이지만 본질적인 것들에 닿지 않는 요소들을 범주의 바깥으로 내보낸 다음에 이야기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게임소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을 만들어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장르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특성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종의 기만적인 의미부여를 만들어 낸다.
비본질적인 주변부의 의미들을 차치하고 나면 용어를 구성하고 있는 게임(game)과 소설(novel)이라는 두 개의 단어가 남는다. 그리고 이 단어들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게임소설에 대한 이해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우선은 게임에 대한 오해들이다. 여기에서도 게임이 가지고 있는 용어적이고 원론적인 부분들로부터 게임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규정되느냐에 따라 그 범위가 달라진다. 이전까지는 게임에 의미를 부여할 때 기존 학문의 방법론들을 차용해 게임의 요소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이야기하고, 재현의 상태 등을 규정하던 방법이 주를 이루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론으로는 게임소설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장르적으로 보았을 때 게임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게임은 전적으로 ‘컴퓨터 게임’ 혹은 ‘온라인 게임’을 중심으로 한다. 이를 정의하기 위해 기존에 게임에 대한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놀이에 대한 경험부터 의미를 끌어와 이야기하려고 하면 그 정체를 밝히기에는 모호한 부분들만 맴돌 뿐이다. 여기에는 인터렉티브 스토리텔링(interactive storytelling)과 같이 소설의 게임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서사들도 제외된다. 이들이 공유했던 비선형적 이야기의 의미들은 게임소설에선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한 오해 또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본질적인 성격이 재현이라고 보았을 때 게임에서의 재현성과 경험에 대한 감각들은 소설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비선형적이라는 게임의 이야기 형태는 기본적으로 소설과의 의미 맥락과 닿지 않는다. 기존의 소설에서 견지하던 미학적인 관점들도 게임의 그것과는 다른 방향성을 지닌다. 그러기 때문에 게임은 사실 비문학적이고 비소설적이다. 그런데 소설과 함께 하나의 개념을 지칭하는 용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일까? 게임소설에 대해 정의하면서 소설에 대한 오해들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흐친(Mikhail Bakhtin)은 루카치(Georg Lukacs)와는 다르게 소설이 현실에 대한 묘사와 재현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에 대한 묘사라고 정의했다. 또한 바흐친은 소설을 통해서 새로운 언어의 발화들이 이루어지고, 풍부한 사회적 의미들이 만들어진다고 정의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소설에 대한 의미들은 떠올릴 때 바흐친의 이러한 형태보다는 형식과 재현의 구조와 미학을 지닌 루카치의 이론들을 떠올리기 쉽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게임소설이란 단어는 굉장히 이질적인 단어들이 병렬되어 형용모순을 일으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게임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소설의 의미에 대한 정의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게임과 소설에 대한 오해들을 걷어내면 일반적으로 ‘온라인 게임’의 영향을 받아서 탄생한 장르라고 정의하는 것이 남게 된다. 이를 기준으로 게임소설을 정의하면 한국에서의 게임소설은 1999년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을》 그 시작으로 삼고 있다. 이후로 《달빛 조각사》(2007)가 크게 성공을 거두어 게임소설 혹은 게임판타지 장르의 존재에 대해 대중들에게 각인시켰고, 《아크》(2008), 《샤이닝 로드》(2011)와 같은 작품들이 나타나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게임소설의 특징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이 중에서도 특히 《달빛 조각사》부터 시작된 장르에 대한 관심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달빛 조각사》로 대표되었던 초창기의 한국의 게임소설이 MMORPG를 중심으로 하고, 그러한 소설의 형태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온라인 게임 혹은 컴퓨터 게임의 발달과 확산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게임소설은 한국에서 게임이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가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에 게임 스타크래프트를 통해서 PC방 문화가 자리를 잡고 나서, 컴퓨터 게임을 위시한 온라인 게임은 일상적인 문화가 되었다. 스타크래프트 이후에 PC에서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서 플레이하던 게임들은 <리니지>나 <바람의 나라>, <디아블로>와 같은 MMORPG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더 이상 소수의 유저들에게 해당하는 매니악한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친구들과 모여서 놀이터로 뛰어가던 아이들의 경험은 모이면 PC방을 가는 것으로 변화했다.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가는 예전에 어떤 놀이를 알고 있는가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게임을 얼마나 잘하는 가에 대한 경험들은 동네에서 놀이를 얼마나 잘하는가와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다. 의미나 효용을 논하기에 앞서, 이러한 현상들이 어느덧 일상과 같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게임을 수용하고 즐기는 형태가 이 시기부터 비약적인 변화를 보인다는 것이다. 콘솔 게임기라는 거대한 자본을 필요로 했던 게임의 형태가 PC방이라는 예외적인 문화를 만나서 일반적인 경험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게임소설은 첨단기술로 인해 나타난 가상공간, 즉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새로운 시뮬라크르에 대한 사고실험 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일상적인 유희의 공간의 모습 중 하나인 것이다. 일본의 《소드 아트 온라인(ソードアート・オンライン)》(2002)이나 서양의 게임 관련 서사들이 VR을 비롯해 다양한 미래기술들로 가상의 공간에 접속하는 모습들을 제법 디테일하게 그리려고 하는 반면에 한국의 게임소설에서 그러한 모습들이 부각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차이 때문이다.
《소드 아트 온라인》에서 아인 크라드에 접속하기 위해 VR 매체인 너브기어를 사용해야 하고 어떠한 원리를 통해 가상세계에 접속해 감각을 유지하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반면, 《달빛 조각사》에서 로열 월드에 접속하는 것은 안내 메시지로만 등장하는 것은 가상세계에 대한 감각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에서의 게임 관련 문화들이 오래도록 아케이드나 콘솔 게임기를 중심으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동안 한국에서는 PC방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통해서 일상적인 것들로 자리를 잡았고, 그러한 경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MMORPG의 세계관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 되었던 것이다.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적인 것들은 과감하게 생략된다고 보았을 때, 한국의 게임소설에서 생략되는 가상의 세계에 대한 접속의 정보들이 그런 것이다.
이것을 두고 기술을 대하는 시각의 차이 등으로 설명하려고도 하지만, 그전에 그러한 기술을 생활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내재화하고 있는 형태의 차이로 설명하는 것이 조금 더 명확한 의미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게임소설을 분석하는 연구들에서도 이러한 형태들은 한국 만의 특징으로 언급되는 것은 이러한 MMORPG 게임의 경험들이 일상화된 것이 그대로 소설 안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상화는 게임의 특정한 구조들이 현실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로도스도 전기(ロードス島戦記)》로부터 이어지는 게임의 요소들이 소설이라는 이야기 형식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즉 캐릭터를 성장시키고(이것은 모험 서사에서 주인공이 성장하는 것과는 또 다른 재현성을 보인다), 모험을 하며(던전에 진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퀘스트를 수행하는), 특수하게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이 자연스러운 경험이 되었고, 그것이 소설이라는 대중적인 이야기하기 방식에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의 게임소설은 단순히 게임의 특정한 요소가 어떠한 상상력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다. 그것은 일상화된 경험들, 가장 익숙한 경험들 중의 하나를 소재로 활용해서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게임소설의 초창기 모형들이 인터넷 카페나 동호회에서 2차 창작과 같은 형태들로 나타났고, 현재 웹소설 플랫폼에서는 판타지의 하위 장르로서 활발하게 창작되고 소비되고 있는 핵심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다. 게임은 더 이상 특정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고, 우리의 일상에 만연해 있는 것이며 우리의 경험 상당 부분이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언어가 우리의 세계를 투영한다고 하면 게임소설은 게임이라는 일상화된 언어들을 묘사한 소설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변화의 여지 또한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일본의 《소드 아트 온라인》 시리즈는 2012년도에 시작된 새로운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가상의 공간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과학적인 근거들에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생이나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해서 게임의 공간으로 이동하여 이야기를 진행하는 서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기계를 통해 접근하는 것을 우회하기 위해 전생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게임이나 가상의 세계를 대중적으로 일상화하고 있는 정도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에서 게임소설도 게임의 변화와 그것의 일상화 정도에 따라 이후로도 계속해서 변용을 거치게 될 것이다.
특히 게임은 재미 노동(labor of fun)의 개념들을 통해 이미 많은 것들을 현실적으로 현현하고, 가상과 현실의 경계와 경험의 층위들을 해체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게임이 단순히 놀이나 유희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다양한 방법론들로 우리들의 현실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사의 문제인가 게임이라는 매카닉의 구조를 통해 나타나는 역학적인 의미인가를 논하기 전에 경험들이 일상화되어서, 이전에 다른 것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들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경험의 변화는 게임의 일상화를 확장시키고, 지속시킬 것이다. 게임은 단순히 유희의 개념을 벗어나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고 사고하며, 반응하는 방법론의 일종이다. 그러기 때문에 게임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미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되었다. 게임이 아닌 것들을 경험하고, 그것들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하며 얻어내려는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의 시대는 이러한 게임의 일상화가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게임소설이 무엇인가에 대한 모호한 의미작용들은 게임이 일상화되기 전 시대가 일상화된 게임의 세계를 보면서 이해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게임소설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소설이 시대를 바라보고 사유하면서 그 시대의 언어들을 투영해 묘사하는 형식을 취해왔던 것과 다르지 않다. 게임에 대한 경험과 그것을 통해서 다양한 욕구들을 해소하는 경험이 일상화된 세대에게 게임소설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는 장르가 되는 것이다. 일상의 경험들은 점점 층위를 더해갈 것이고 새로운 경험과 의미에 대한 것들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면 게임소설은 또다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형식이나 소재의 활용과 같은 것들에 대한 섣부른 의미부여나 한계를 진단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이야기들이 소비되는 형태들을 통해 무엇이 드러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한국의 게임소설은 21세기 대중들의 일상과 내재화되어 있는 경험들을 투명하게 미러링 하고 있는 소설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 원고는 한국출판문화연구소의 <기획회의> 486호(2018.4.20)의 '대세는 게임소설2' 특집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