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니까.
야무지게 든 종이컵은 내가 좋아하는 300원짜리 번데기, 엄마가 좋아하는 건 500원짜리 소라. 20년이 훌쩍 더 지났지만 저때의 날들이 선명하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 정서적 경험과 충족으로 자란다고 한다. 적절한 사랑과 경험은 우리 뇌에 저장되어서 지난날을 떠올리고 기억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98년의 봄날이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에 난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엄마와 함께 보낸 시간이, 엄마와 함께 했던 봄의 공기가, 엄마 품에 안겼던 엄마의 온기가, 엄마와 각자 좋아하는 걸 사 먹었던 경험까지 엄마와 함께여서 모든 것이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떻게 빛나는 날들만 있을까. 그렇지 못한 날들이 허다하지. 그럼에도 어린 시절, 엄마가 나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엄마가 나와 함께 하지 못했던 더 기나긴 시간들까지도 퉁치게 만들어줬다. 그건 엄마가 엄마여서, 나의 엄마여서, 그럼에도 엄마여서, 죽어서도 엄마는 나의 엄마여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3년 전,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여러 고민들과 선택 앞에서 답답한 마음에 하지도 않는 하소연을 그것도 몇 년째 보지도 않는 사람에게 했었다. 나의 엄마.
교류가 잦지 않는 엄마와 나는 몇 년만 하는 연락이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카톡을 보냈다. 그리고 일방적인 하소연을 했다. 오랜만에 하는 연락이 징징거리는 소리여서 엄마도 당황스러웠겠지만 그날은 그러고 싶었다. 살면서 해본 적이 없는 행동을 다 커버린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했고,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다고 시시콜콜 투덜거렸다. 결론은 엄마가 보고 싶고, 굉장히 힘들어서 나도 누군가한테 기대고 싶고,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엄마였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엄마한테 연락했는데,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나를 엄마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고, 엄마가 나를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이었다. 그 어떤 위로도 사랑도 받을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도 엄마는 나의 바람대로 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나홀로 삼킬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엄마한테 못나게 굴어서 벌 받는 것 같다고 했다. 나의 푸념을 들은 엄마는 이미 예상했던 그대로, 나의 엄마 그 자체였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고 피상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우리 공주 철들었네. “
엄마와 나는 살가운 모녀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나를 공주라 부른다. 내가 아는 엄마는 애정표현이 서툰 사람이다. 어쩌면 모든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더딘 사람일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엄마를 닮은 것 같다. 나를 표현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감정표현 하는 걸 두려워했었다. 우리 엄마는 본인이 낳은 딸인데도 딸을 마주하는 것조차도 버거워한다. 눈을 보고 마주 앉으면 엄마의 눈은 내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해 있다. 눈을 피하고, 깊은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 조금이라도 대화가 깊어질 듯하면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해버리는 사람. 그래서 하는 말들 뿐이라곤 언제나 피상적인 말들 뿐이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 딸에게 공주라고 하는 건 그에게 최고의 표현이자,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공주라는 한마디에 얼마나 다양한 마음이 뒤섞여 함축되어 있을지 안다. 미안함, 죄책감, 고마움, 그리움, 사랑 또 뭐가 있을까.. 그 단어 하나에 엄마는 수많은 마음을 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힘들어하는 나에게 엄마가 심리적 포용을 해줄 거라는 기대감은 애초에 없었다. 엄마는 나를 안아주지도 알아주지도 못할 테니까. 나의 엄마는 딸을 이해하려는 싶은 마음보다, 내가 자신을 여자이자 엄마로서 더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앞선 사람이니까.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딸인 내가 이해해주길 바랄테니까. 엄마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았지만 가장 큰 상처도 받았다. 엄마는 나에게 가장 큰 사랑을 주었겠지만, 가장 큰 공허함을 주기도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의 세상을 이해한다. 엄마가 가장 필요한 순간들마다 엄마는 내 옆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나의 엄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