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지윤 Nov 14. 2020

영화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에>를 만들고

영화를 만들고 쓴 글

*해당 글에 들어간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몇 번의 영화제를 통해 Q&A를 하며,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 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많은 것들이 우연히 일어난 일들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며 이루어졌고,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 역시 이 영화라는 결과물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또한 나와 내 가족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다큐멘터리이기에, 공개적인 자리에서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순간순간 고민해야 했다.


Q&A를 거치고 나니 영화의 의미가 내게도 새롭게 다가왔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내가 알아보지 못했던 의미들을 재발견하는 과정이었다. 기획, 촬영, 편집을 거치며 완성된 영화는 시작점으로부터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했던 본질과 방향은 언제나 같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시간과 애정을 쏟은 첫 번째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이 올해 몇 회 남지 않았다. 시원섭섭한 마음에 그간의 기억을 불러모아 글로 남겨두어야겠다 싶었다.


다큐멘터리, 너무나도 불확실한 과정의 연속
 
일시성과 덧없음을 포착하는 작업에 꾸준히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모래성을 짓는 과정을 담은 시퀀스를 이 영화의 구조이자 주제를 위한 시각적 언어로 잡았다. 하지만 그 외의 많은 것들은 즉흥적으로 이뤄졌다. 외할머니의 병원에서 있었던 엄마와의 대화,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될 외할머니 집을 찍은 것, 사주 상담가를 만난 것 등 내 삶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기록하며 그것들에 반응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만드는 과정을 촬영할 때 역시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이후 그 장면들은 편집을 통해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편집의 과정을 통해,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질문하며 찾고 있던 것들, 즉 '무의식적인 의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삶의 불확실함을 이야기한다. 삶은 불완전하고, 예측할 수 없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을 억지로 완전하고 확실하다고 끼워 맞추지 않았다. 대신 그냥 그 불완전함과 불확실함을 피하지 않고 바라본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두기도 한다. 엄마와 외할머니의 관계, 나와 외할머니의 관계 속에는 아직 서로 모르는 것들이 가득하다. 마지막에 겨우 힘겹게 완성되는 모래성도 언제 곧 부서질 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할머니 그리고 엄마와 대화를 이어가고, 파도가 밀려오지만 모래성은 멈추지않고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 역시 불확실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계획은 엎어지고 자주 변경되었다. 하지만 그 불확실함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카메라와 함께 따라가다 보니 또 새로운 기회들이 보였다.

 
‘사적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넘어
 

아주 개인적인 영화일 수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이 영화가 지나치게 사적으로 파고들지 않기를 바랐다. 친밀하고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누구나 자기 이야기라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영화일 수 있도록, 적절한 감정적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래서 나의 내레이션은 최대한 건조하게, 최소한으로 넣었다. 병원에서 외할머니와 엄마를 촬영할 때도 최대한 멀리서, 혹은 숨어서 관찰하듯 찍었다. 마치 제삼자의 이방인이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병원에 계신 외할머니를 찍을 때는 외할머니를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사실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고 취약한 상황에 있던 외할머니를 촬영해 여러 관객에게 왜 보여줘야 하는지, 이유 자체에 의문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얼굴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장면은 세 컷이 채 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기록물과 푸티지를 사용할 때는 항상 스스로 질문했다. "다른 사람들이 내 개인적인 영화를 왜 봐야 하지? 다른 사람이 시간을 들여서 왜 너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봐야 하니?" 이 질문은 편집하는 과정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였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만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자기 인생을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당연히 영화는 관객의 그 마음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이 영화에서는 많은 것들의 의미가 열려있다. 사람에 따라 각자의 경험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완성되는 하나의 모래성 역시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모래성을 만들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인 다큐멘터리'지만 그게 감독인 나에게만 개인적인 것이 아닌, 관객들 각자에게 '개인적이다'라고 다가가길 바랐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만들기 전, 만드는 동안, 만들고 난 뒤 그리고 상영이 끝난 이후에 영화에 대해 느끼는 바가 각기 달랐다. 훗날 미래에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도 그 의미가 달라질 것 같다. 어떤 식으로 달라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욱 기대되기도 한다.


*

이 영화를 최초로 상영했던 영국의 '오픈시티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이 영화는 'Between Generations'(세대 간의)라는 제목의 단편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됐다. '세대 간의'라는 그 제목이 어떤 '커다란 시간'을 다루는 이 영화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는 왜 사주 상담가와의 대화를 영화의 시작 부분에 넣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받았다. 사주 상담가는 가까운 미래뿐만 아니라 오십년 정도 후라는 먼 미래에 감독에게 일어날 일들을 얘기한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일부러 뺐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아득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영화 중간중간에는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에 외할머니와 눈을 마주치고 찍은 사진 등 약 삼십여 년 전의 과거 기록물들이 등장한다. 나는 먼 미래와 먼 과거를 연결 지으며, 그 커다란 시간에 기대어 현재의 상실감이나 불확실함 등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 이유로 사주 상담가와의 대화 장면과 어린 시절의 푸티지들을 넣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다가오는 상실에 대한 영화이지만 동시에 희망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상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지만, 그 과정을 바라보며 삶이 그렇게 허무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공유하고 싶었다.


2020년 11월

글. 박지윤


[줄거리: 또 다른 상실을 기다리는 동안, 한 여자가 집요하게 무언가를 쌓아올리고 있다. 하지만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따라 많은 것들이 쉽게 부서지고 있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들은 말해지지 않는 것만 같다. 22번째 이사를 한 감독. 그녀는 멀리 계신 외할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감독이 뒤늦게 할머니와의 관계를 쌓아가는 동안, 어디선가 모래로 만든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다. 다가오는 것들을 기다리는 시간. 카메라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 찬 삶의 연약함을 매만진다.


아주 먼 미래와 먼 과거를 연결 지으며, 그 커다란 시간에 기대어 현재의 상실감이나 불확실함 등을 극복하려고 했다. 영화는 곧 사라질 할머니의 집, 할머니가 지내던 병원, 그리고 모래성이 지어지는 과정 등 다른 종류의 푸티지들을 교차시켜 보여준다. 이 모든 과정은 곧 있을 슬픔의 순간을 늦추려는 절박한 시도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다가오는 상실에 대한 영화이지만 동시에 희망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상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지만, 그 과정을 바라보며 삶이 그렇게 허무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공유하고 싶었다.]


*해당 글에 들어간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엇갈리는 응시, 그럼에도 계속 바라본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