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타닥 vs 다다다다

도쿄 도란소란

by 여럿

오랜만에 구직 사이트에 접속했다. 동거인 이직 준비를 도우며 곰곰히 따져보니 내 경력도 딱 이직하기에 좋을 타이밍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괜찮은 회사가 있는지 확인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로그인을 했다. 도쿄에서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뉴스를 최근에 본 것도 같은데 소문일 뿐이었나. 활기 넘치는 스타트업부터 굵직한 글로벌 회사까지 채용 공고가 차고 넘친다. 하나씩 넘겨볼 때마다 뭔가 마음에서 꿈틀댄다. 이건 분명 3년을 주기로 용솟음치는 근거 없고 이상한 열정이다. 내 찬란한 물경력이 저들 회사 중 어딘가에서는 쓰이지 않을까 하는 막무가내 자신감이 곁들여진. 뭔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상상의 나래를 앞서 펼치는 뇌는 어느새 파격적인 연봉 협상에 성공해 남은 휴가를 펑펑 써대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이트 프로필은 3년 전 현직장으로 이직한 후 업데이트 되지 않고 멈춰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정성껏 쓴다고 썼는데 어쩐지 엉성하다. 영어 프로필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경력을 영어로 기재하는데 왠지 문법도 틀린 것 같고 단어도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걸 싹 뜯어 고치는 것이 이직 준비의 첫 단추라는 거. 회사에서 어떤 성과를 냈는지 정리하고 그걸로 지원 회사 인사팀을 유혹해야한다는 거. 잘 아는데 귀찮아도 너무 귀찮다.


그때 떠올랐다. Chat GPT.


웬만한 인간보다 똑똑하기로 유명한 이 놈을 여지껏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았다. 이참에 아날로그 인간인 나도 신문물에 접근해보는 거야.


복잡한 프로그램을 깔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구글에 Chat GPT라고 쓰니까 웹사이트가 나왔다. 이름 그대로 채팅창 하나가 뿅 있고 거기에 원하는 질문을 쓰면 되는 모양이었다. 오호라. 일단 내가 사이트에 써 두었던 경력을 입력하고 문장을 이력서 형식에 맞게 고쳐달라고 타이핑했다. 타닥타닥. 엔터를 치니까 잠시 침묵하던 놈이 글자를 다다다다 쏟아내기 시작했다.


The를 쓸지 a를 쓸지 고민하지도 않고 단어를 중복해서 쓰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맥락상 가장 적합해보이는 단어와 문장을 완벽하게 써내려 갔다.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10초 만에 완성된 놀라운 수준의 문장들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명 내가 쓴 문장과 내용은 같은데 훨씬 있어 보였다. 똑똑한 영어 선생님이 내 이력서를 첨삭해 준 것 마냥 가뿐하고 군더더기 없는 결과물이었다. Chat GPT를 켠지 딱 30분 만에 이력 전체를 마음에 꼭 들게 수정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밀려왔다. 아직도 동사에 s를 안 붙여서, 시제를 틀려서,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써서 영어 선생님에게 지적 받는데 Chat GPT는 절대 그럴 일 없겠지. 어떤 업무를 수행하고 결과를 도출해내는 능력치 면에서 인간은 인공지능을 이길 도리가 없겠구나. 감탄스럽지만 한편으로 허탈하다. 불필요한 스트레스도 비효율적인 과정과 절차도 놈에게는 없다. 내가 할 수 없는 걸 인공지능은 이토록 부담 없이 해낸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나는 할 수 있을런지…잘 생각 나지 않았다. 안돼 이대로 가다간 내 밥줄이 로보트한테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좀 비루하지만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이런 거다. 인공지능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만큼 경망스럽게 감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오두방정은 인공지능도 예측 못할테니까. 매일 거의 똑같은 노을을 보면서 매번 다른 추억을 이야기하지도 못하겠지. 한없이 초라해졌다가도 무지막지하게 강인해지는 인간의 슈퍼파워를 가질 수도 없을테고. 인공지능은 항상 정답에 가까운 최선의 답만을 내놓으니 좌절을 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인간적인 순간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인공지능은 결코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냥 인간다울 때 인공지능 능력치를 넘어서는 존재가 되는 것 아닌가 싶다. 별 것 아니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있다. 정답도 오답도 아니면서 일상을 구성하는 것. 휘황찬란하고 압도적인 능력 앞에서 그런 것들이 아무 쓸모 없고 때로는 무의미해 보이지만 사실 인간을 지탱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

결론이 싱거운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싱거운 마무리는 인간이 아니면 할 수 없을걸.

꼬우면 인간 하시던지.


작가의 이전글십일 층으로 도망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