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유학
#이민
아빠가 어느날 넌 어딜 가고싶냐기에, (가고싶지 않으면 안될거처럼) “난 옥스포드 대학이나, 연세대를 가고싶어.“ 라고 말했다, 그당시 느끼기에 이름이 예뻐서.
옥스포드나 연세대학교라고 했는데, 그 대화가 있던지 얼마 안되 난 캐나다 밴쿠버로 유학을 간다고 엄마가 말했다.
캐나다, 밴쿠버란 도시는 잘 들어보지도 못했고, 전혀 아는게 없었다. 그 많은 도시중 왜 나의 부모님은 밴쿠버를 택했는진 모르겠다. 아니, 어디가고싶냐고 물어보긴 왜 물어봤을까…ㅋㅋㅋ
그러던 어느날, 엄마의 친구 딸인 E와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1996년즘, 그때 내나인 16살, E는 15살이 였다.
E와 나는 엄마끼리 친구일뿐 둘사이의 어떠한 교류는 없던차다.
그때는 Air Canada 대신 Canadian Airline이란게 있어서 그걸 타고 왔다. (우린 그때 캐내디언 에어라인을 캐내다이언 에어라인으로 읽었다. )
다들 알다시피 난 그때 파라과이 라는 남미의 작은 나라에서 살았더래서, 파라과이는 직행이 없기에, 이웃나라 브라질 상파울로로 작은 비행기를 타고가 토론토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토론토에서 밴쿠버행을 하던때다. 아, 토론토가 아니라 엘에이 였던가…
암튼 그렇게 오랜 비행을 하고 우린 처음으로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을 하였다.
4월의 밴쿠버는 봄날의 날씨가 한참 빛날땐데, 열대나라에서 온 우린 추위에 바들바들 떨었다.
우린 바로 파라과이 출신 한인 홈스테이로 보내졌다. 그 작은 벙갈로 집에는 우리 말고도 3명의 파라과이 출신 한인 애들이 살았다, 다 비슷한 나이.
다들 비슷한 나이의 다섯명이니 잘 어울리고 재밌을 만도 한데, 우린 서로 잘 못어울렸다. 그도 그런게, 나와 E는 Asuncion이라는 파라과이, 한국으로 치자면 서울에서 왔고, 다른이들은 Ciudad del Este (직역하자면 East City)라는 한국으로 치자면 부산같은 도시에서 온게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우린 주구장창 스패니쉬만 했는데, 그들은 (Ciudad del Este는 브라질 국경에 있던 도시였다) 스패니쉬와 브라질어인 Portuguese를 했다. 그 작은 집은 한국어, 영어, 스패인어, 포르투갈어가 남발을 하는집이였다.
우린 그때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쌩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도시에 어쩌다보니 같이 떨어지게 된것이였다. 촌나라에서 왔으니 첨에는 신기한거 투성이에, 처음으로 누리는 자유라는거에 신이나서 미칠지경이였다. 엄마가 내앞으로 신용카드도 내줬겠다, 잔소리하는 어른도 없고, 쥐꼬리같은 용돈대신 펑펑 써도 되는(된다고 느꼈떤) 카드에 고삐풀린 망아지 였을것이다. 옷이며 화장품이며 가방이며 매일이 쇼핑이였고, 학교에서 알게된 한국 대학생 언니오빠들과 매일이 파티였다.
난 굉장히 신이 나서 산다고 생각햇는데, 어느날 내 뒤에 오던 E가 묻는다. “언니, 왜그렇게 손에 힘을 주고 걸어?” 그러고보니 어느날에서 부턴가 내 손바닥 가운덴 굳은살이 배겼더라. 주먹을 꼭 쥐고 걷는 버릇이 든거다. 나도 모르게 항상 경계상태를 유지한 모양이였다.
E와 나는 예전엔 교류하나 없던 사이였지만, 덩그마니 넘겨지자 의지할데라곤 서로밖에 없었다.
한살밖에 많치않았던 내게, 그녀는 저의 총재산과, 여권 등 중요한 서류를 맞겼다. 같은집에 같은 방쓰며 살아도 한살이라도 많은 내게 그런걸 맞기는게 맘이 놓였던 모양이다.
그때 우린 학교도 같아 24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생활을 할때다. 우린 친자매를 넘어서 영혼의 단짝같았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햇소리 궁합과 게그 코드가 그렇게 잘 맞을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궁합이라면 결혼을 했어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유학이 결국 각자의 가족들도 제 3의 나라인 캐나다 밴쿠버 이민으로 연결이 되었다.
이미 오지에서의 이민 경력 10여단 이였으니, 나의 가족들은 캐나다의 생활에 둥지를 트는데 그닥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다 어찌하여 그 둥지가 사스캐추완으로 옮겨졌을때, “캬, 우리는 온도가 거의 100도 차이나게 살고있네.” 라고 아빠가 말했다. 파라과이 여름 최고 온도 45도를 넘나드는데 살다, 사스캐추완 -45도 되던날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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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에게도 이민이나 유학을 권하진 않는다. 더군다나 오지에서의 이민은. 어른들이야 자신들의 결정이라지만, 아이들에겐 평생 지고 가야하는 상처와 짐들이 있기에…
하지만, 그만큼 다채로운 경험을 해보기란 쉽지 않아, 살아가는데 약간은 다른 류의 시선이 발달이 된거같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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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이정도 하다보면 할말이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을 하고 어디에서 끊어야할지 난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