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을 지키며 사는 일꾼이 이제는 귀하다.
샌프란시스코의 Fillmore street에는 부티크 샾들과 각종 레스토랑, 바들이 즐비하다. 필모어 스트릿을 따라 쭉 걸어내려가면 샌프란의 허리에 해당하는 Geary blvd 가 나오는데 거기 바로 밑에 한국식품 가게가 있다. 나는 보통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 식료품을 사서 걸어서 집에 온다.
이 날 따라 난 햇고구마며 배추 한 통, 무 한 개 이렇게 무거운 아이템을 사서 이고 지고 걷다 보니 마스크의 훅훅거리는 숨이 온몸을 달구는 느낌이 들어 차가운 커피 한 모금이 아주 간절해졌다. 입 안이 쩍쩍 달라붙는 느낌이다. 마침 이 스타벅스가 앞에 보이는데 마감이 10분이 남았다. 아, 애매하다. 하지만 일단 들어갔다.
‘제가 너무 늦게 들어왔나요….?’
하며 물어보니 바리스타 두 명 중 한 명이 활짝 웃으며 아니요, 십분 남았어요 하고 주문을 받는다. 난 주저 없이 Shaken Espresso를 주문했다. 이 음료는 에스프레소 샷을 얼음 위에 붓고 거기에 Brown Sugar를 넣고 가열차게 흔들어 위로는 뽀얀 거품이 생기고 흑설탕의 감칠맛이 커피의 쓴 맛을 감싸주는 아주 꿀맛인 음료다.
칵테일도 착 착 착 착 흔들면 알코올과 그 밖의 재료들이 곱게 섞이며 더 깊은 맛을 내듯이 커피도 재료를 잘 흔들어주면 흔들면서 얼음이 믹서 역할을 하며 맛은 좀 더 곱고 부드럽고 감칠맛이 난다. 여기에 우리의 미숫가루처럼 섬세한 고소한 맛이 나는 오트 밀크를 넣어주면 설탕이 녹은 에스프레소는 무거워 밑에 깔리고 오트 밀크는 위에 떠서 기막힌 층이 생긴다. 이 오트 밀크의 고소함을 극대화시키는 게 또 계핏가루다. 이 계핏가루를 솔솔 뿌렸느냐, 안 뿌렸느냐의 차이는 김밥 위에 참기름을 발랐냐 안 발랐냐의 차이만큼 극명하며 작지만 큰 차이를 바리스타가 고려했는지 유무도 금방 알게 하는 척도다.
저 두 개의 층이 생긴 아이스커피의 자태를 보면 바리스타가 100% 원래 연구자의 의도대로 맛있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셔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맨 먼저 느껴지는 신선한 에스프레소의 향미가 입안에 퍼진다. 그 맛있는 쓴 맛을 김비서 뒤에서 살짝 포옹하는 부회장님처럼 감칠맛 나는 깊은 단맛이 감싸준다. 이 단 맛이 너무 과하면 에스프레소의 기품을 떨어뜨리고 너무 약하면 쓴 맛이 강해져서 목 넘김이 고약하다. 이 바리스타는 또한 계핏가루가 겉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오트 밀크에 계핏가루를 뿌려서 그것을 셰이크 한 다음에 얼음과 흔들어둔 커피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 살짝 흔들어준 오트 밀크는 부드러운 크림 같은 맛이 더 강해지고 계피의 고소함은 배가 되었다.
브라보! 눈물 나게 맛있다.
이 커피가 공연이었다면 나는 기립박수를 쳤을 것이다. 식료품 봉지를 바리바리 들고 걷던 나에게 인간의 세계가 아닌 완벽한 맛이었다. 나는 카운터로 다가가서
‘이거 누가 만들었어요?’
하고 물었다. 뭐가 잘못됐나 싶어 바리스타 한 명이 소심하게 손을 든다.
‘내가 여태 이 음료를 수도 없이 시켰는데 이렇게 완벽한 맛은 처음이에요. 작지만 받으세요.’
하고 5불을 쥐어줬다. 작은 돈이지만 커피값과 맞먹으니 100% 팁이다. 맨날 카드만 들고 다니니 현금이 없는 것도 변명이다. 그 바리스타가 ‘에게! 고작?!!!’ 이랬을까? 내 작지만 감동의 팁을 받은 바리스타와 그 동료는 오오! 서로 쳐다보며 굉장히 기뻐했다.
나는 이 바리스타가 마감이 임박한 순간에 이미 넣을 거 다 넣고 치울 거 다 치우고도 이 커피 한 잔을 이렇게 성실하게 만든 태도에 크게 감명받았다. 스타벅스의 메뉴 개발자들은 몇 천 번의 맛 테스트를 거쳐 최고의 맛을 내는 레시피를 만들어 각 지점에 새 메뉴로 출시한다. 하지만 최전선의 바리스타들이 레시피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과정의 하나라도 생략하면 커피 맛은 크게 달라진다.
물처럼 묽은 커피, 에스프레소의 양보다 너무 많은 오트 밀크, 설탕이 덜 들어가 쓴 맛만 나는 커피 등등 같은 메뉴를 시켜도 지점마다 혹은 같은 지점이라도 누가 커피를 만드냐에 따라 복불복인 커피가 바로 이 Shaken Espresso이다. 그리고 나의 커피를 만들어준 바리스타는 원칙을 성실하게 지켜 최고의 커피를 만들어서 제공했다.
일하면서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공사현장의 안전사고, 대기업의 갑질, 군부대의 비리, 입사 및 승진의 불평등 모든 이슈는 우리가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일을 편하게 하려 꼼수를 쓰거나 원래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사회는 어지러워진다.
내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 이제는 정말 귀하다. 난 그 사람들에게 적절한 보상과 격려가 이루어져 그것을 본 동료들에게 원칙을 지키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알았으면 싶었다.
아, 달콤하다.
이 완벽한 커피를 마시는 나라는 사람은 얼마나 또 행운인가? 달고 시원하고 충실한 맛.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