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꿈을 다독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이름은 크리스티나 Chiristina이다. 미국이라 친구라 하지만 연배는 나보다 훨씬 위이다. 크리스티나는 당차고 우아한 여성이고 인생의 2막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하는 나의 친구이다. 딸을 대학교 보내서 졸업도 시켜놓고 이제 좀 쉬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 때 나를 만났단다. 크리스티나는 백자와도 같았고 나는 그림이 너무 많아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는 잡탕 그림이었다. 둘 다 ‘나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하는데 답이 안 나왔다.
인생도 하나의 전쟁과도 같다.
적진에 뛰어들어 우두머리의 목을 베면 그 밑의 수하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뿔뿔이 흩어지거나 아니면 적진의 장수에게 포로로 잡혀 처참한 몰골이 된다. 인생도 딱 그렇다. 딸 졸업만 시키자, 그 한 가지 목표로 앞만 보고 몇 년을 내리 달린 크리스티나는 딸을 졸업시키고
‘나 이제 뭐 하지? 나는 왜 살아야 하는 걸까?’ 하는
아주 근원적이고 간단하지만 쉽게 아무도 답을 못 내리는 그 질문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딸의 졸업 전이 인생 1막이었다면 이제 인생 2막을 열어야 하는데 연극의 제목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나는 또 어떠한가.
크리스티나가 목적지 설정이 안돼 못나가는 배라면 나는 목적지가 수시로 바뀌어 연료만 태우고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하는 배였다.
다른 SNS의 피드를 보거나 책을 읽다 보면 번개 같은 아이디어가 생겨서 옳다구나! 하다가도 뒤 돌아 생각해보면 이게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인지, 이게 먹히는 아이디언지, 이게 시도해볼 만한 프로젝트인지 어느 것 하나 “YES”라고 답 할 수가 없어 시간만 보내고 이거 좀 만지작, 저거 좀 만지작 바쁘기만 했다. 결과물이 없었다. 나이만 먹고 있다.
나는 점점 더 괴로워졌고 누구에게, 가능하다면 나를 모르는 제삼자에게 ,내 아이디어 주머니를 보여주고 이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 이게 먹히는 아이디어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때 크리스티나가 내가 다가와 친구가 되었고 우리는 죽이 꽤 잘 맞는다.
우리는 래드 베이 카페로 향했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둘이 팔짱을 끼고 걸었다. 나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써서 서로 존칭을 사용하는 것도 참 마음에 든다. 서로 적정선을 지키며 예의가 허락하는 한에서 자유롭게 얘기한다.
나는 이 날 내가 사용하는 스케치북을 가져갔는데 내가 그린 그림들을 보여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나는 사실 우리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책을 쓰는 게 맘 속 프로젝트이기에 내가 손으로 그린 그림을 보여줬는데 너무 귀엽다며 반응이 좋다. 우리 고양이가 입양된 이유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의 스토리를 그림이 있는 책으로 내고 싶다고 하자 내 손을 꼭 잡고
‘지영 씨, 그 생각 너무 멋지고 아주 잘 될 거 같아요. 사실은 나도 그림 스케치한 게 있었어요. 한 번 볼래요?’
하며 아주 귀엽고 심플한 디자인 하나를 보여줬다. 서로의 그림을 보면서 공통점도 찾고 그림으로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나열하다 보니 사실 내가 생각했던 프로젝트 하나로 파생되는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했다.
나는 이야기 도중 나온 아이디어를 휴대폰 노트에 재빨리 적었다. 뒤돌아서면 잊을지도 몰라, 그럼 안되지! 하면서 적고 또 적었다. 내가 그렇게 자신 없어하던 아이디어들이 둘이 머리를 맞대고 스케치를 하면서 하나하나 선명하게 보이니 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거 되겠구나,
이게 괜찮은 아니 디어였구나,
이게 현실성이 있구나.!
하나하나 짚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이미 성공한 사람처럼 너무 기쁘고 또 뿌듯했다.
우리는 시간 가면 줄 모르고 열중했다. 그림을 그리고, 아이디어를 수정하고,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기본예산을 짜 봤다. 서로 얼굴을 보며 우리 남들이 보면 기업 하나 세우는 줄 알겠다며 웃었다. 남들이 웃으면 어떠랴! 나에게는 소중한 프로젝트고 지금 이 순간 내 심장이 뛴다는 사실 말고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몇 달을 지지부진 고민하던 내 머릿속 아이디어의 잡탕 그림이 하나하나 움직여 여백이 생기고, 제 자리를 찾고, 겹친 부분을 떼내서 하나의 그림으로 분리되었다. 그렇게 본 내 아이디어들은 저마다 귀했고 쓸모가 있었다. 난 그게 무엇보다 더 기쁘다.
크리스티나와 그날 헤어지고 난 뒤 나는 남편의 친구가 방문해서 정신이 없었고 그 전 주에는 길 위에 주차한 차가 털려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 레드 베이 카페에서 우리가 한 이야기들은 지금 생각해도 설레다.
난 이번 주말에 그 카페에 다시 갈 생각이다. 그때 그 자리에 앉아서 그 스케치북을 펴고 펜을 잡을 거다. 주춤한 내 아니 디어 들을 하나하나 새로 다잡고 내 인생의 그림을 다시 그릴 것이다. 거기만 가면 왠지 또 술술 풀릴 것만 같다.
가자.
가기만 해도 뭔가 잘 풀릴 것 같은 그 카페에 가자. 앉아있기만 하면 어떠랴.
기라도 받아오면 그것도 좋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