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사
홈스테이의 첫 주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나는 빠르게 주변 상황에 적응을 하면서도 집에서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공기 중에 뜬 기분이었다. 단체 생활을 못 견뎌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내가 그걸 몰랐던 거 같다. 낯선 사람과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도 힘들었고 그 저녁으로 주로 나오던 아무 음식도 힘들었다. 바쁜 생활을 하던 주인집 여자를 생각해보면 저녁마다 집에 세 들어 살던 학생들의 밥을 차려주는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지금은 이해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도 불만 중에 하나였다.
내가 지내던 홈스테이 집의 안주인은 40대 중반의 어린아이들 데이케어를 하는 여자였는데 그 아이들이 못해도 오후 3시까지는 1층 거실에 있어서 주방을 마음 놓고 들락이지 못하는 것도 나에겐 큰 마이너스였다. 나는 그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고 난방이 안 되는 방은 차갑고 눅눅했다. 차가운 침대 속에 들어가 온몸의 체온이 침대를 덥히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뒤척이며 추위를 이기고 또 이겨냈다.
지금은 ‘내가 불편하면 뭔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서 다음날 바로 ‘저기, 밤에 너무 추운데 난방은 어떻게 하나요?’ 하며 물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언어도 다르고 혼자 미국에 와있다는 심리적인 위축감이 들어서 그런 말을 할 엄두를 못 냈다. 그저 밤에 떨고 또 떨어 침대를 덥히고는 그 온기를 잃지 않으려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자려 애썼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안은 차가웠고 온몸이 아팠다. 어차피 한 달 계약을 하고 온 집이라 끝은 정해져 있다. 나는 이사 갈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가지고 있던 델컴을 켜고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한 남학생과 연락이 닿았다. 나는 당시에 여자보다는 남자가 마음이 더 편해 남학생의 룸메이트 광고를 보고 문의를 했다. 왜 남자가 마음이 편하냐고? 여학교를 나온 나에게 여자애들의 까탈스러움과 급변하는 기분을 맞추는 게 트라우마로 남아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남자들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의 최대 목적은 무조건 싼 집이었으므로 나는 그 남학생에게 거실에서 지내는 조건으로 $600불이라는 딜을 하게 되었다. $1500에서 $600의 딜이란 너무 큰 호재처럼 느껴져 나는 정신없이 짐을 칭겼다. 2주라는 기간이 남았지만 나는 가차 없이 키를 두고는 ‘나 다른 데로 이사 갑니다.’라는 메모만 두고 짐을 챙겨나왔다.
미국에서 이사를 하는데 과정은 어떨까? 미국은 전세의 개념이 없다. 당연하다. 은행 이자가 터무니없이 싼 나라에서 전세금을 고스란히 돌려줘야 하는 그런 제도는 먹히지 않는다. 모두 월세이다. 새 집으로 이사를 갈 때는 보증금 Deposit을 내고 한 달치 월세를 미리 지불하고 들어간다. 보증금은 보통 한 달치 월세이고 수도세는 집주인이 보통 내준다.
학생들의 경우 신분의 불안정함 때문에 미리 와서 자리 잡은 유학생이 집을 골라 계약하고 그 집에 방과 거실을 따로 렌트를 주는 식이다. 인터넷 비용과 전기세 등을 명수로 나눠 받는 식이다. 나는 이 당시 같이 사는 남학생이 부유한 집 자식이라 보증금도 받지 않고 날 받아주었다. 보통은 보증금+인터넷 비용+한 달치 월세를 한 번에 내고 들어간다. 전기세는 아직 쓰지 않았으므로 한 달 뒤에 내기 시작한다.
새로 이사한 집은 3번가를 따라 곧게 걸어가서 다리를 건너야 한다. 3번가는 SOMA 지역으로 부유한 직장인, 돈 많은 학생들이 사는 좋은 빌딩이 많다. 한 달에 $600을 내고 거실에서 생활하는 나는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게 좋아 보였다. 저 많은 레스토랑 중에 내가 부담 없이 들어갈 곳은 한 군데도 없어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지금은 원하는데 아무 데나 들어가서 맥주와 저녁 메뉴 두 가지를 시킬 텐데 (절대 하나만 못 먹습니다.) 그때는 첫째도 절약, 둘째도 절약이었다.
3번가의 끝이 물가에 이르면 꼭 뱀의 독니처럼 생긴 이 다리 위를 지나갔다. 빠르게 지나치는 차들과 느리게 흐르는 물의 아이러니를 보며 한 동안 서서 물을 쳐다보기도 했다. 조용히 운하의 물을 보다 보면 어느 날은 참을 수 없이 외로웠고 다른 날은 마음이 평화로워지기도 했다. 나는 MBTI에서 infj인데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외로워서 한국에 돌아갔을 것이다. 다행히도 외로운 운하도, 평화로운 운하도 나에게는 그저 묵묵히 흐르는 물이고 나도 그 물처럼 그저 조용히 흐를 뿐이었다. 매일을 그렇게 이 다리 위를 걷고 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