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들은 거야, 대체!
그는 지영이 혜선과 통화하는 모습을 찬찬히 훑어본다. 발끝으로 땅을 파며 얼굴을 새빨갛게 달구는 게 참 귀엽다. 미국에 와서 지내는 지난 3년간 주변의 여자들이라고는 모두 오픈마인드와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는 여자들 뿐이라 그녀의 저런 망설임과 수줍음이 퍽 새로웠다. 생각해보니 그와 그녀의 나이 차가 상당하다. 이해가 간다. 그는 곧 38세 생일 파티를 할 예정이었다.
연분홍 레깅스에 흰 티를 앞으로 졸라맨 지영은 전체적으로 가녀린 체구지만 꽃 사진을 찍을 때 드러낸 뒷모습은 큰 반전이 있었다. 어려서 그런가. 흰 티 사이로 살짝 보이는 배꼽도 앙증맞다. 널브러졌을 때 살짝 흘러내린 티셔츠 위로 보인 어깨는 가녀리고 희다. 캘리포니아 햇빛을 어떻게 피해 다닌 거지.
“가서 그냥 쿨하게 인사해. 그리고 술 한 잔 하자고 하면서 자빠뜨려!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지영이 작은 손으로 입술을 훑으며 얼굴을 붉힌다.
‘나를 자빠뜨린다고? 속되면서도 직접적인 표현이군.’
술을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다는 그녀가 자신을 도대체 어떻게 자빠뜨릴지 몹시도 궁금하다. 그는 항상 운동과 명상을 통해 몸을 다져왔고 키도 꽤 큰 편이었다. 집안 대대로 모두가 내로라하는 주당이기도 했다.
[자빠뜨린다, 흰 어깨, 이마에 잔머리, 곧 21세]
다음 소설의 소재가 될 법한 단어들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다. 시선이 느껴진다. 힐끗 보니 또 내 손을 넋 놓고 바라본다. 하얀 얼굴을 발 그스름 하게 물들이고 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연신 귀 뒤로 쓸어 넘긴다. 귓불이 하얗고 탐스럽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그렇게 내 손이 마음에 드나? 손을 허벅지 위에 편안히 올렸다. 손을 따라 내려온 눈길이 내 허벅지를 훑는다. 다리에 단단히 힘이 들어간다. 그녀가 ‘오’ 하며 입술로 감탄한다.
‘이 아가씨 그렇게 수줍어하면서 시선은 위험하네.’
시선이 곧장 위로 올라온다. 훗- 남자는 가슴을 곧게 폈다. 보고 싶다는데 잘 보여야지. 그리고 곧 얼굴로 올라오는 시선. 모른 척할까? 마주칠까?
결정을 내리기 전 그녀의 시선이 눈으로 올라왔다. 그녀의 반응이 몹시도 궁금했다. 그녀의 얼굴은 잠시 정지한 후 곧 눈이 커다랗게 떠지고 작은 입술도 크게 벌어진다.
동공 지진.
참 식상하다 생각한 그 표현이 이렇게 신선하게 다가올 날이 올 줄이야. 수정처럼 반짝이는 눈은 놀라움과 당황, 부끄러움으로 흔들렸고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너무 놀라게 한 모양이네. ‘
곧 그녀가 일어설 준비를 하며 통화를 마무리한다.
“왠지 너무 창피한 걸 어떡해… 그리고 내 처녀 딱지 걱정 말고 네 거나 떼는 게 어때? 참나… 혜선아 나 진짜 누가 들을까 봐 무서워 어휴. 이따 봐!”
저런 말을 남자 앞에서 잘도 하는군. 남자는 헛웃음이 나왔다. 집에 간다는데 내 손이나 보여줄까? 여태 도화 빛이 남은 그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기 전, 그는 손을 불쑥 내밀었다.
깜짝 놀란 그녀의 표정을 보니 좀 더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내 손, 그렇게 맘에 든다면서요. 자요.”
“네…?”
“내 손, 마음에 드는 거 아니었어요?”
그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 그게… 한국말하세요..?”
아차.
그녀는 나를 중국인으로 알았나 보다. 왠지 나쁜 짓을 한 거 같아 미안해진다.
“한국 사람이에요. 아까는 중국인 친구랑 통화. 근데 나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큭-“
“읏…!!!!”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어쩔 줄 몰라했다. 새빨개진 얼굴 위로 바람에 날린 머리가 흘러내린다. 동상처럼 굳은 그녀를 보니 내심 미안하다. 내 동생 제니라면 ‘흥, 그래서 뭐요?’ 라며 신경도 안 쓸 텐데…
“괜찮아요?”
망부석처럼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간 그는 손을 그녀의 얼굴 앞에 좌우로 흔들었다.
“꺅!”
… 꺅??
그녀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앞을 보고 가야 할 텐데.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잘도 뛰어가는군. 내가 너무 심했나.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여자 같아서 싫어하던 손이었다.
“이제 보니 되게 마음에 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