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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Jul 16. 2021

나는 백발마녀, 다중인격 엄마다

영국 방학



바야흐로 방학이다. 아이들에게는 '드디어!' 나에게는 '벌써?'가 되어 버린 한 여름 방학, 두 달 간의 동상이몽이 시작되었다.


큰 아드님은 방학이 끝나면 한국 고3에 해당하는 13학년이 된다. 한국과는 너무 달라서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놀고 싶은 만큼 노는 그런 고3이다. 요즘은 느지막이 일어나 자영업 사장님 출근하듯 학교에 가신다. 방학인데도 말이다. 품 안의 자식이라더니 품에 안기에는 너무 커버리 기도 했고, 작년 여름 사춘기를 앓고 난 후, 원래도 그랬지만 더욱 철이 들어버렸다. 반은 믿어주는 심정으로 반은 응원의 의미로 말없이 점심 같은 아침상을 차려 드린다.


언젠가부터 살가운 말이나 다정한 표정은 어쩐지 어색하고 낯설어졌다. 우리는 예의를 갖추고 두 손 모아 서로에게 인사를 한다.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하면 "어디를 가시던, 언제 돌아오시던, 안녕히 다녀오시라'고 화답한다. 이럴 때면 마치 남자 어른 한 분을 모시고 사는 것 같다. 나는 삼 형제의 스무 살 독립을 꿈꾸고 있으니 어찌 보면 계획대로 되고 있는 것 같다.




둘째는 나와 성정이 달라도 너무 달라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 서로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하여 방학 시작과 함께 템즈강에서 종일 노를 저으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시라고 로잉(Rowing) 캠프에 등록시켰다. 제 아버지를 똑 닮아 언제나 당당하고 식욕이 왕성한 아이다. 매일 다양한 메뉴로 주문을 하시는데, 정성껏 도시락만 싸주면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오신다.


<런던 탬즈강에서 노젓는 아드님>


그렇다고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 잠들 때까지 컴퓨터와 물아일체가 되신다. 지나치다 싶은 시점에 나는 격조 있게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는 대답이 없다. 평소 내 목소리는 알토인데 이럴 때는 뱃심 좋은 바리톤이 된다. 또 한 번 이름을 불러 보지만 메타버스(Meta Verse)에 몰아지경이 되신 그는 반응이 없다. 나는 마지막 카드, 백발마녀 모드로 변신한다. 흰머리를 휘날리며 날아오르듯 계단을 뛰어 넘는다. 숨을 가다듬고 방문을 연다.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으나 그간의 못마땅함이 방언이 되어 터져 나온다. 평생을 교회에 다녔어도 방언은커녕 소리 내어 기도도 못하는데 말이다.


이쯤 되면 보이지 않던 가족 구성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식사 때 외에는 뵙기 힘든 큰 아드님이 먼저 방문을 열고 나오신다. 가족의 평화를 세상 제일 덕목으로 여기는 이분은 이런 상황을 두고 보지 못한다. 남편님도 등판하신다. 둘째에게 일찌감치 핸드폰도 사주시고 최근에 컴퓨터도 최신으로 바꿔주신 둘째를 똑 닮은 그분 말이다. 본인만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강력히 믿는 남편께서 세기의 재판을 시작하신다. 그러나 결국 서로 지키지 못할 판결만 덩그러니 남기고 상황이 종료된다.




사실 그들의 노력이 아녔어도 우리의 분쟁은 잔잔한 호숫가에 던지는 돌과 같다. 작은 돌로 시작된 파동이 한없이 퍼져나갈 것 같지만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는 어느새 둘째를 위한 도시락 메뉴를 짜고 있고, 둘째는 무작정 달려들어 백 허그를 시전 한다. 보통의 경우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런데 오늘은 예상치 못한 일격이 날아온다. 백허그를 한 채로 둘째가 말한다. 엄마의 방언 때문에 미처 하지 못했던 코멘트였나 보다.


 "근데 엄마~, 엄마 브레인은 퍼니쉬먼트(Punishment)와 어워드(Award) 시스템이 고장 난 것 같아요"

"뭐라고??"

"잘한 일은 1분도 어워드를 안 하고, 잘못한 일은 왜 끝도 없이 퍼니쉬먼트를 해요?"

"뭐?!......."


방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뭔가 억울한 생각이 든다. 100번을 잘못하면 이해하고 참다가 딱 한번 얘기하는 내 마음을 그가 알겠나! 아무튼 강력한 아이의 한마디에 할말을 잃은건 사실이다.


 이제야 생각난다 '잘한 것의 총량과 잘못한 것의 총량만큼만 반응하는 딥러닝 인공지능 시스템 두뇌이시다!' 혼자 '이거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엄마 오기만 기다리다 잠든 늦둥이가 잠결에 내 목을 끌어 안으며 말한다.


“엄마는 왜 늙을수록 예뻐져~”



나는 다중인격 엄마다. 때로는 하숙집 아줌마, 때로는 두뇌 시스템이 고장 난 백발마녀. 그래도 딱 한 사람에게만은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천사 같은 엄마이다. 사실 아이는 나의 젊은 시절을 본 적이 없다. 늦둥이 막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이미 흰머리가 무성한 늙은 엄마였다.


내일은 미장원에 가서 검게 뿌리 염색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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