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왜 그렇게 빨리 떠나버렸어. 언젠가부터 내가 보낸 문자에 답도 없고. 건강 회복하고 영국 오기로 했잖아. 언니가 아파서 못 오면 내가 언니에게 가겠다고 했잖아. 큰 아이가 대학 가면, 막내가 조금 더 크면 언니를 만나러 가야지 했단 말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그랬어. 아이들이 다 커도 언니가 보고 싶어도 이제 어디를 가도 언니를 만날 수가 없네.
내가 런던으로 오고 나서 언니가 말했지. '지영아~ 너 그곳하고 너무 잘 어울려.’ 난 오히려 언니 생각이 났어. 언니가 정말 좋아하겠다. 강아지 데리고 공원 산책하고, 벤치에 앉아 커피 마시며 책 읽고, 음악 듣고 미술관에 가고. 언니가 행복해하는 순간들이잖아. 아이들 다 크고 우리 둘 외로워지면 이곳에서 의지하며 같이 살아도 되겠다 했잖아.
언니, 언니가 내 어린 시절 이야기 자주 해주던 게 생각나. 언니가 갓 대학생이 되었을 때 언니의 조카인 내가 태어났다고. 조그맣고 통통한 아기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학교 끝나면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고. 내 아기 때 사진을 보면 참 이쁘지 않았는데 언니는 그저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던 거야.
우리 엄마에게 포대기로 나를 엎어 달라해서는 기저귀 가방을 둘러메고 언니 집으로 데려가 주말을 보냈다고. 너무 순하고 예쁘더라고. 내가 눈을 똘망 거리며 언니를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새근새근 잠이 들기도 했다고.
언니는 버스에 내려서도 언덕을 한참 올라야 닿는 산자락 밑 어느 양옥집에 살고 있었잖아. 내 기억 속 언니는 언제나 여리고 가냘픈 소녀였어. 그런 언니가 커다란 기저귀 가방을 둘러메고 아기를 등에 업고 언덕을 오르내렸다니. 이야기를 듣다가 웃음이 나기도 했어.
그렇게 아기를 예뻐하던 언니가 결혼을 하고 정말 천사 같은 아기를 낳았어. 이젠 언니가 언니의 아기를 안고 우리 집에 왔지. 참 행복해 보였어. 시간이 흘렀고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미국으로 떠났어. 언니는 그렇게 서울에 혼자 남았지.
난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를 앓는 대학생이 되었고 언니는 반포의 어느 중학교 음악 선생님이었어. 난 수업이 끝나면 언니 집에 갔어. 커튼이 내려진 어둑한 거실에 낮은 조명이 켜져 있었는데. 턴테이블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고 책장에는 문학사상, 창작과 비평에서 나온 책들이 빼곡했어. 탁자엔 커피 잔 하나 그리고 언니가 읽던 책 한 권의 어떤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지.
언니는 농담을 하다가도 멍하게 있거나 한숨을 내려놓았어. 그러다가 또 웃기도 하고. 그리고 아이 이야기를 했어.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손에 땀이 너무 많이 났다고. 아이는 종이 책이 젖을까 봐 비닐장갑을 끼고 책장을 넘긴다고. 피아노를 가르친 적이 없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한번 들은 음악은 모두 피아노 건반 위에서 그대로 연주 해 낸다고.
난 '천재인가 봐!' 했고 그러면 언니는 흐뭇해하며 웃었어.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피아노가 놓인 아이 방 문을 열고 'OO아~OO아~' 소리 내어 불렀어. 동그래진 내 눈을 보고 언니는 부끄럽게 웃었어. '옆집에서 들으면 나 이상한 여자라고 하겠지'하면서. 나도 따라 웃었지. 언니는 아기를 낳고 쓰기 시작한 일기장을 꺼내와 보여줬는데. 그림도 잘 그리는 언니는 아기의 손, 발을 너무 사랑스럽게 그려 놓았더라.
어느 날인가는 언니가 꼭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며 나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렸어. 경기도 안성 어딘가였는데 포도밭을 지나 한참을 가니 ‘웃는 돌’이라 쓰여진 나무 간판이 보였어. 현대무용가 홍신자가 공연도 하고 거주하던 곳이라고 했어. 하얀 천막으로 둘러진 공연장 안에 나무 등걸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살고 있다는 집의 모양새까지 참 기이한 여자다 생각했어. 글도 쓰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춘다는 그 여자를 언니가 참 좋아하더라. 언니 내면에 그런 모습이 있구나 싶었어.
나를 예술의 전당에 처음 데려간 것도 언니였어. 예당이 개관하던 해였던 것 같아. 음악당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한여름 햇살 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 인사동 갤러리에 데리고 간 것도 언니야.
미팅하느라 바쁜 친구들, 학생 운동가를 가열차게 불러대던 선배들 사이에서 난 자발적 아웃사이더였어. 그래서인지 언니랑 보내는 시간이 좋았어. 언니에게는 어떤 신비한 세상이 있는 것 같았어.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언니가 미국으로 떠나버렸어. 나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몇 년 후 한국을 떠났고. 이제 우리는 멀리서 가끔 서로 안부만 전했지. 언니 아들, 내 조카는 버클리 음대를 졸업하고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었다고 했어.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 연주회를 한다는 소식도 들렸고. 언니 아들, 참 멋지게 잘 자랐어. 아름다운 내면과 외면, 그리고 음악을 하게 된 것도 언니의 영향일 거야.
언니, 이런 기억도 있다. 미국 동부 어느 마을로 이사 간 언니랑 전화 통화를 했는데 나는 아침, 언니는 밤이었어. '지영! 언니 집은 숲 속에 있어' 그래서 나는 '언니 숲 속 집에서 뭐해?'하고 물었지. 언니는 집 앞 차 안에서 빗소리를 듣고 있다고 했어. 음악 소리도 들렸고. 아마 커피도 마시고 있었을 거야. 모두 언니가 좋아하는 거잖아. '우리 만나야 하는데... 정말 만나야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계속했던 것 같아.
그리고도 몇 년이 더 흐르고 나서야 우리는 만나게 되었어. 언니와 나 모두 서울에 잠시 머물던 때야. 나는 여의도 IFC 몰로 장소를 정했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돼. 언니는 그때 이미 아픈 상태였고 예전과 달았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 둘 다 너무 외로운 곳에서 한적하게만 살아왔으니, 젊은 도시의 기운을 느껴보자고. 사람이 북적대는 초고층 빌딩의 온갖 편의시설을 누려보자고 했지.
언니가 나에게 그랬듯이 나도 언니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어. 풀코스 한정식으로 시작해 VIP 영화관에 가고 아로마 스파까지, 나는 언니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어. 언니는 아무 말 없이 따라다녔지만 많이 피곤하고 우울해 보였어. 나는 언니가 치매를 앓던 나의 고모, 언니의 엄마를 3년 넘게 돌보느라 그리고 고모가 돌아가시고 나서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다고만 생각했어. 그래서 너무 말라버린 언니를 잘 먹이고, 피곤해 보이는 언니를 푹 쉬게 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언니가 예전 같지 않은 거야. '언니! 밥 잘 챙겨 먹어, 운동도 해야 해, 그리고 즐겁게 살자'하는 말을 나는 몇 번이나 한 것 같아. 그러면 언니는 '언니가 좀 아파'라고만 했지. 그런 언니가 답답해서 나는 같은 말을 또 했어. 그래도 나의 잔소리가 싫지 않았던지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잖아. 피곤한 언니를 데리고 또 밤새 이야기를 하며 그날 밤을 보냈어.
(나중에 알았지만 언니는 파킨슨병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고 근육과 신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평생 함께하던 피아노도 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들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걱정할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거다.)
언니 나한테는 좀 말해 주지 그랬어. 그럼 언니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을 거고, 소화가 안 된다는데 계속 좀 더 먹으라고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날 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일어나 나를 위해 모닝커피를 내리고 토스트를 굽고 과일을 다소곳하게 담아 내주었잖아.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어. 어렵고 힘든 건 모두 혼자 감당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항상 무언가를 내어주는.
언니와 그렇게 헤어지고 몇 년 전 언니가 요양원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언니가 다시 예전처럼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었어. 그래서 런던에 오라고도하고 언니가 좋아하는 미술관이며 연주회 이야기를 자주 전해주었어. 처음엔 언니도 '가야지! 그래야지. 그랬으면 좋겠다.' 했는데. 언젠가부터 소식이 뜸해지더니 하루는 이렇게 말하더라고, '지영, 언니가 아파서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후로 언니는 내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도 답을 하지 못했고 언젠가부터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더라. 그래서 이제는 내가 언니를 만나러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있었어.
언니! 언니는 마음이 따뜻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어.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일 거야.
언니가 홀로 외로울 때, 아프고 힘들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그리고 그동안 우리 곁에 있어 주어서 너무 고마워. 언니 나도 이곳에서 잘 지내다가 언니 만나러 갈게. 이제는 아프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어.
언니,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