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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Dec 08. 2022

열아홉의 나에게 보내는 심심한 사과

제일 잘난 사람이 되지 못해 쏘리.

 고등학생 시절 수많은 꿈을 꾸며 성공욕에 불타오르던 나를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쯤부터 쓰던 원목 책상을 사용한다.

당시 체구가 큰 포근한 인상의 과외 선생님께 몇 년 동안 수학을 배웠다. 

원래 공부하던 책상이 비좁아지자 엄마는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공부할 수 있도록 어디선가 가로 폭이 긴 나무 책상을 만들어 왔다.

10년이나 된 책상인데도 흔들거리는 곳 하나 없이 아주 견고하다.


 그리고 희미해지긴 했지만 지워지지 않는 낙서도 남아있다.

 '이젠 고3'이라고 적어놓았던 나.

 그 밑엔 '어느덧 대3'

내가 책상 앞을 떠나 있던 동안 여기에 앉아서 공부했던 동생이 적어 놓은

'난 중3'이라는 낙서도 남아있다.

그 아래 며칠 전 '어느덧 30대...'라는 낙서를 추가했다.

 

 집을 세 번이나 옮기는 동안에도 항상 함께 했던 책상이다.

엄마에게 결혼하고 신혼집에 갈 땐 절대 안 가져갈 거라고, 예쁜 새 책상 살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는데...

여전히 난 이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다.

다시 보니 참 애틋해서 더 오래오래 나와 함께 했으면 한다.


 그리고 이 책상 위에 자리하는 오래된 물건 두 개가 있다.

어디서 산지 기억나지 않는 진한 보라색 필통. 

이 필통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특이하고 예쁜 필통을 보면 기어코 사고야마는 필통 콜렉터였다.

필통 쇼핑은 용돈 받아 생활하던 고등학생이 부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치였다.

그러다 반짝반짝 빛나는 보라색에 사로잡혔고, 그 필통은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한테 

 "오천 원짜리 필통인데 이렇게 튼튼해!"라고 말하며 늘 가지고 다녔는데

오늘 보니 얘도 세월의 풍파를 많이 맞기는 했다. 

쭈글쭈글해진 표면이 안쓰럽다. 너도 나랑 같이 나이를 먹어 가는구나.


오래된 나무 책상, 필통 그리고 꿈 노트


 그리고 표지부터 마지막 장까지 아무런 글도 없는 무지 공책.

내가 얼마나 욕심이 많던 아이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물건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내 이야기로 채워가고 싶어서 골랐던 공책이다. 

2009년의 10월 17일 일기로 시작하는 이 노트에는

수능을 보기 전 복잡한 아이의 생각들이 가득하다.


 "평범한 인생은 정말 싫다."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안타깝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평범한 건 싫어. 난 제일 잘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이런 오만방자한 2009년의 나 같으니.

많은 고3들이 그러하겠지만 수능이 인생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날들이었다.

수능 점수로 내 삶의 행복이 결정될 줄 알았던 날들.

수능을 며칠 남기지 않은 고3의 고뇌와 포부가 수없이 남아있다.

지금 보면 저런 내가 참 낯설 정도로 난 소소한 행복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문득 열아홉의 나에게 미안해졌다.

그때의 너도 참 힘들고 아팠을 텐데. 

평균값의 길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내가 되어서 미안해.


 콕콕 찔러대는 과거의 나, 그리고 기억.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쓸리는 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버텨가는 중이다.


 2022년의 나도 2009년의 나처럼 자주 길을 잃고 헤맨다.

다만 이제 길을 잃어도 걷다 보면 어디든 닿게 된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제일 잘난 사람'이 아닌 '오늘 하루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열아홉의 내가

날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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