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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Feb 01. 2023

이겨내는 사랑은 하지 말아요

- THE END -


 과거의 내가 낯설고 오늘의 나는 반갑지 않다.


 요즘 이런 이상한 하루가 자주 반복된다.

나는 잔잔해졌다. 그런데 어떤 날은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 울컥 차오를 때가 있다.

잠깐 그 사람을 떠 올릴 때가 그렇다.  

음... 그 사람의 마음이 넘쳐 나한테 흘러들어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넘쳐흐르지 않으려면 그와 나의 감정 둘 다 잔잔해져야겠구나.

그래서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구나 싶다.


 설 전 날, 오래된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연락이 왔다.

 “요즘은 어때?”

라고 친구가 물었다.

 “살만해. 재밌는데 버겁기도 하고. 근데 잘 버티는 중이야.”

라고 답했다.



 11월에 갔던 명상 클래스에서 선생님이 물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지금 나를 채우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지 색연필을 주며 그려보라고 했다.

적갈색을 골랐었나? 그때는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제일 먼저였다.

지금의 난 물 탄 먹색 색연필을 들 것 같다.

쿰쿰한 냄새가 묘하게 풍기는 그런 슬픈 감정이 아직은 남아있다.

티 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이제 내가 울면 주위에서 지겨워하지 않을까?

담아둔지 꽤 된 슬픔이라 눈물에서 나는 냄새를 들킬 것만 같다.

상대방이 선뜻 손 내어 닦아주기 찝찝한 그런 눈물. 그래서 이젠 울기가 싫다.






 “우리 결혼 못 해.”

 약 세 달 전, 나를 후벼 팠던 그 사람의 무책임한 한 마디.

어렵게 지켜온 우리 관계를 흔들어 놓았던 이 한 마디가 너무 아팠다.


 여전히 생각한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사람이 조금 이성적인 생각을 했다면, 좀 더 성숙한 사람이라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라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지금 나는 전과는 너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정신없이 바쁘고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새로운 환경에 치어서 작년의 일을 단 1초도 생각하지 않고 흘러 보내는 하루도 생겼다.


 어떤 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럼 차근차근 되네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그렇게 수없이 이유를 찾으며 나는 포기를 인정한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했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 관계에서 최선을 다 해서. 그리고 일이 터진 후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곳으로 떠나와서.

그리고 날 지지해 주는 든든한 사람들이 있어서.

아이러니하지만 참 운이 좋다. 미련을 내려놓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그 사랑을 지키겠다고, 이 상황을 함께 무찔러보자고... 난 그런 이겨내는 사랑은 하지 못했다.

칼날이 찔러대는 곳으로 껴안고 함께 들어갔다간 언젠간 혹시 내가 이 칼로 널 찌른 건 아닌지,

네가 날 찌른 건 아닌지 혼란스러운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런 지경이 오면 추억도 힘이 되지 않겠지.


 누군가를 만나다 보면 나는 할 만큼 했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때 그 사랑이 자꾸 멀어진다면, 날 다치게 한다면 그냥 놓아주자.


 함께 한 시간들이 재미있었으니 여운이 남는 건 당연한 거다. 그렇지만 다시 그 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추억하는 것만 남았다. 한 사람을 잃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나 혼자였던게 아닐까?

운이 좋아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사람을 만났던 거다. 그 시간이 끝이 나고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결국 잃은 건 없다. 그 시간을 공유하고 즐겼으니 얻기만 했다.

아름다웠던 날들로 기억해야지. 이제 날 돌봐야지.


행복해지고 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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