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AI 공부보다 중요한 건 '나' 공부 아닐까
2년 전, 코칭을 배우러 처음 갔을 때, 코칭을 하는 건 되는데 자꾸 코칭을 받는 게 안 됐다.
코칭을 받을 때는 본인의 어젠다와 어려움을 꺼내야 하는데 자꾸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어,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걱정이 없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라고 생각했고, 더 근본적인 나의 어려움과 슬픔, 고통스러움은 전혀 떠올려지지가 않더라.
그렇게 얕은 주제로 코칭받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아 나한테 뭔가 이렇게 커다란 슬픔과 어려움을 꺼내는 것 자체에 대한 방어기제가 있나 보다' 하고 알게 됐다.
나에게 어떤 한계 선 같은 게 있다. 그 선을 넘기 전까지는 힘들어도 버티고, 말도 해보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가, 그 선을 넘어 나를 잃을 것 같은 순간 (가능하면) 그것을 내 삶에서 제거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는다. 축복받은 망각 능력 덕분에 정말 잘 까먹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애써 헤집지 않는 한 그때의 감정과 추억이 쉽게 떠오르진 않는다. 하나하나 꼬리를 물고 들어가야 떠오를 뿐.
이런 내 특성 덕분에 나는 정말 힘들고 정말적인 순간에서도 금방 그걸 잊고 다시 나로 되돌아왔던 듯하다. 그렇게 자라왔고 살아왔다.
며칠 전 오래간만에 Alex Verlek 코치님의 마스터 클래스를 들으러 다녀왔다.
요새는 외부에서 따로 코치 활동을 하진 않아서 오래간만에 코치 자아도 되찾고 다시 한번 체화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번 코칭 클래스의 주제는 '관계, 갈등, 번아웃'이었다.
코액티브를 근간으로 한 코칭 클래스는 대부분 수업이 이렇게 흘러간다.
1. 기본 지식에 대해 설명한다.
2. 마스터 코치가 데모 코칭을 보여준다. 관찰하고 배운 것을 나눈다.
3. 우리가 2인 1조가 되어 직접 코칭을 한다. 피드백을 받고 나눈다.
스트레스, 기쁨, 관계에 대한 데모코칭과 수업이 끝나고 마지막 '갈등'에 대한 수업을 시작했다. '갈등'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 자체만으로 기쁜 느낌은 아니었다. 불편함에 가까웠다. 데모 코칭 지원자로 손을 들까 말까 수없이 고민하다가 용기 내서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주저하는 게 느껴졌는지 마스터 코치님이 내 손을 붙잡고 훌쩍 앞으로 데려가셨다.
그렇게 코칭을 받기 시작고 '갈등'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코치: '갈등'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나: 관계를 위해 갈등이 필요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너무 피하고 싶어요.
코치: 방금 그 자세는 무엇인가요?
나: 저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는 그런 열린 자세요. 언제나 이렇게 지내고 싶어요
코치: 방금 거기서 Powefully vulnerability(강력한 연약함)이 느껴져요.
나: 그러네요.
코치: 그럼 반대 자세를 취해보세요. 지금은 무엇이 느껴지나요?
나: 뭔가 답답하고, 누가 한 대 때리면 저도 쳐야 될 것 같아요.
코치: 심장 쪽 마음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나: 긴장하는 자세니까 저도 좀 답답해요. 불편하기도 하고요.
(코칭 진행)
코치: Regection이라는 단어, 여기 뭔가 있는 것 같아요.
나: 맞아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제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있나 봐요. 나와 분명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다를 수 있는데 거절당하거나 충돌하는 게 무서워요.
이때부터 나는 코칭 세션 내내 계속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아마 그 단어가 나의 무언가 깊은 내면을 건드렸으리라. 처음으로 '내가 나의 아픈 기억과 감정을 온전히 열었다', '나 코칭을 제대로 받았다'라는 감각이 느껴졌다.
코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 일단 제가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해 주신 코치님께 고맙고, 저 스스로에게 '잘했다!'라고 칭찬해주고 싶어요.
거절과 다름, 충돌에 대한 두려움
이번 코칭 시간, 최근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나에게 거절, 다름, 충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특성은 내가 사람과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자각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는데도 내 주장을 하고 이야기를 할 때 조금은 긴장되고 두렵다. 특히 그게 내가 오래도록 고민한 것이거나, 내 삶의 중요한 가치관에서 기인한 것일 때 더 그렇다. 나한테는 이게 이렇게 중요한데 상대한테는 눈곱만큼도 중요하지 않을까 봐서.
거절받을까 상처받을까 두려워 정말 물어봐야 할 때 물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오래도록 아팠다. 더 본질적으로는 아마도 나의 존재가 거절당할까 봐 두려운 것 같다. 나에게 상대는 너무나도 중요한데, 상대에게는 내가 중요한 존재가 아닐까 봐 그것이 두렵다.
어찌 보면 우린 모두 다른 인간이고, 저마다의 생각, 저마다의 가치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는 것인데 나는 왜 이리도 '다름, 거절, 충돌'을 두려워할까.
이 것은 아마도 과거에서 기인한 것이겠지 싶다. 나의 기억 속에 '거절'에 대한 공포를 심어준 무언가가 있겠지, 하지만 내가 그것을 온전히 치유하지 않은 채 덮어버려서 아직 어린 시절 속의 나는 무서워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이 것은 내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충분히 적고, 그때의 어린 지유에게 '괜찮아'라고 다독여주는 순간이 있고 충분히 괜찮아질 때까지 반복하면 자연스레 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관계는 좋은 충돌을 통해 깊어진다.
팀은 좋은 충돌을 통해 단단해지고 나아간다.
거절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 대해, 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한다.
이 문장들을 내가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제나 강력한 연약함, 한지유라는 자아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공개적으로 쓴 다는 행위가 나의 두려움을 용기 있게 인정하고, 새로운 나의 이야기를 써가는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 아니 그럴 것임을 안다.
강력한 연약함.
오래도록 기억할, 오래도록 함께할 나만의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