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취미 부자가 돼버린 인간의 취미 일지
취미로 도예를 추천하는 사람
손으로 만들어보는 것에 흥미가 있고, 조금은 정적이면서도 순간에 집중할수 있는 취미를 찾고 있는 사람. 도예는 흙명상이라 불릴만큼 순간의 집중력을 요하고, 실력이 느는게 보이면서, 굉장히 실용적인 취미다.
2023년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직장인의 취미 찾기 - 취미가 뭐예요?라는 물음에 마땅한 대답이 없을 때
3년이 지난 2026년 나는 그 사이에 취미 부자가 돼버렸다! 무취미 인간에서 3년 만에 취미 예찬론자가 된 것이다. 3년 전 내가 그랬듯 누군가는 취미가 꼭 필요할까 싶을 수 있지만, 나는 이제 매주 즐길 수 있는 운동 하나, 그리고 취미 하나쯤을 갖는 것은 삶을 굉장히 풍요롭고 윤택하게 만든 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평생 나만의 취미를 가꿔나가고 싶다. 나는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취미 딱 하나를 고르고 평생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때에 맞게 끌리는 것에 몰입해서 배워가며 조금씩 조금씩 나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중이다. 이럴 땐 이 취미, 이럴 땐 이 운동. 이렇게 나만의 힐링 레시피와 처방전이 엄청 늘어난 기분이랄까.
주변에 나만의 취미를 찾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중에 흥미로운 무언가를 시도해 볼 수도 있을 테니 나만의 취미 일지를 공유해 본다.
도예는 동료 디자이너 분이 한 분이 이미 오랜 취미로 갖고 계셨는데 궁금해서 쫄래쫄래 따라갔다.
2024년 9월 그렇게 처음으로 도자기를 시작했다. 첫 수업부터 12주간은 매주 일요일마다 공방에 가서 물레를 찼다. 흙의 중심을 잡고 원하는 사이즈의 기물을 만드는 감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격주에 한 번씩 가서 원하는 다기나 접시, 찻잔, 꽃병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2026년 지금은 잠시 쉬는 중이다.
도예는 흙을 만지며 집중하는 그 순간순간이,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져서 다시 내 생활 속에서 사용하거나 선물하는 순간이 참 행복한 취미다.
2024년 9월 14일
오늘 태어나서 물레를 처음 돌려봤다. 사실 물레 앞에 앉기도 전에 정규 반에 등록했다. 나는 생각보다 내가 좋아하게 될 것에 대한 직관이 있는데 물레 또한 그랬다 최근 평일에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빠듯해지면서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흙에 집중하는 순간이 꽤 좋다. 앞으로 이 시간을 꽤나 좋아할 것 같다.
동료분 덕분에 처음부터 좋은 공방, 좋은 선생님을 만나 감사하다.
물 묻은 흙을 처음 만졌을 때는 생각보다 미끄덩거리고 물고기 같아서 놀랐는데 손을 조금만 대도 변화하는 게 참 신기하고 재밌다.
물레는 중심 잡기가 반 이상이란다.
삶과 같군. 흙도 삶도 중심과 균형을 잘 잡아봐야지.
찻잔도, 개완도, 주전자도 맛있는 디저트를 올려둘 접시도 만들고 싶다.
엄마가 오픈할 찻집에서는 딸이 만든 차도구를 내어줄지도.
2024년 10월 27일
중심 좀 잡았다 싶으니 굽 깎기는 더 어렵다. 물컵에 빵꾸 뚫을 뻔...
송곳으로 흔들린 윗면을 자를 때도, 굽칼로 굽을 깎을 때도, 나의 감각을 믿고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다가가야 한다. 자신이 없으면 칼이 면을 따라가 버려 더 엉망이 된다. 물레 속도가 너무 빠르면 내가 통제하지 못해 엉망이 된다. 하나씩 하나씩 감각을 익혀가는 기쁨이 크다.
2024년 11월 3일
오늘은 초벌 구워진 컵들에 유약을 발랐다. 하나하나 어떤 색이 어울릴까 고민하면서 정성껏 색칠했다.
유약을 한번 바르는지, 두 번 바르는지. 또는 여러 개를 섞어서 이중시유를 하는지에 따라 색이 달라지고 가마의 온도나 컨디션에 따라서도 모두 달라진다고 한다. 우연성의 산물이 기대된다.
2024년 11월 9일
9월 14일 처음 시작한 물레, 드디어 오늘 첫 완성작을 만났다! 선생님이 정성 들여 찍어주셨다.
물레를 차고, 굽을 깎고, 초벌 굽고, 유약 하나하나 골라 바르고, 재벌 구워 만난 소중한 완성품.
그동안 만드는 과정도 충분히 즐거웠는데 만들어진 아이들을 보니 더 소중하다.
가까이 보면 사실 크기도 다르고 원형이 아닌 애도 있지 만 아무렴 뭐 어때!
2024년 11월 30일
지혜지. 지혜롭게 나아가다, 지혜롭게 대답하다는 뜻을 가진 이름 지유.
지혜가 내 안에 있음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혜지로 도장을 만들었다.
나는 항상 지혜를 갈망해 왔다. 아무리 지식을 쌓아도 내 속에 지혜는 없는 것 같았달까. 지혜가 없어서 이름이라도 그렇게 지었나 생각했 고, 항상 똑똑한 사람보다 지혜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올해 내 목표 중 하나는 지혜의 원천이 밖이 아닌 내 안에 있음을 진 심으로 믿는 것이었다. 코칭에서 배운 삶의 충만, 균형, 현존을 기억하며 매일 조금 더 지혜로워지는 것.
이제 당신은 충분히 지혜로운가?라는 질문에 '네'라고 답할 순 없지 만 적어도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지혜롭다. 오늘의 나는 작년의 나보다 한참 지혜롭다.
굽을 깎고 도장을 찍는 순간마다, 도자기를 사용하며 이 글자를 다시금 꺼내 보는 순간마다 스스로를 더 단단히 믿어주고 지혜로워지기를. 나중에 내 도자기를 쓰는 누군가에게도 이 마음이 전달되기를.
2024년 12월 14일
처음으로 대형 기물을 만들었다. 파스타 접시다. 접시는 초벌, 재벌을 할 때마다 조금씩 수축하기 때문에 처음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만들어야 우리가 원하는 사이즈가 된다. 이게 조금 어렵다.
나름 세트로 사이즈를 맞추고 싶어서 자로 날개 크기와, 안쪽 사이즈를 재가면서 만들었다.
얼른 파스타접시가 만들어지면 밥 먹을 때 써보고 싶다!
2025년 1월 19일
옥색. 유약을 바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내가 참 옥색, 청록색, 바다 색 계열을 좋아한다는 거다.
집고 바르고 보면 언제나 이런 계열에 손에 가있다.
셋 다 유약과 이중시유, 가마의 온도의 우연성의 산물이라 맘에 들지만 특히 가운데 있는 접시가 구름이 떠있는 느낌이라 맘에 든다.
2025년 2월 22일
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구우면 완전한 흰색이 되는 백토, 베이지색이 나오는 적토, 검은색이 되는 흑토 등
이 흙은 흑토다. 진한 초콜릿 색에 가깝고 만들 때도 흙과 모래 사이의 거친 질감이 느껴진다. 굽고 나서도 그 거친 질감이 참 매력적인 흙이다. 여러 번 유약을 시도해 봤는데 투명유약이 가장 이 흙의 매력을 잘 살려주는 것 같다.
2025년 3월 8일
수업을 들을 때는 사실 만드는 것이 정해져 있었는데, 오히려 정해지지 않으니 뭘 만들지, 어떠한 형태로 만들지 더 고민된다. 처음으로 차 마실 때 쓰는 다기 중에서 주전자를 만들어봤다.
손잡이는 두 가지 스타일을 만들어봤는데, 손잡이가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 주둥이를 어떤 모양으로 잡고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동양적이거나 모던한 느낌이 난다.
주전자는 지금까지 만들었던 것 중에 가장 어려웠다. 뚜껑, 손잡이, 주둥이, 파트토 가장 많고 쓸만한 형태로 만들어야 하다 보니 그립감도 신경 써야 하는데 생각만큼 잘되진 않았다. 아직 말랑한 흙 상태에서 어떻게 붙어야 편한 각도와 모양인지 상상하기가 어렵다고 할까.. 그래도 새로운 도전이라 즐겁다.
2025년 6월 22일
드디어 주전자 두 개와 소주잔이 완성됐다. 올해 특별히 나를 많이 도와주신 셋째아빠와 아빠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소주잔 다섯 개 세트 2개씩 만들었다. 사실 만들고, 굽고, 유약 바르고, 재벌 하고. 정성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서 선물하기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의 시간과 정성을 들여 단 하나만 있는 선물을 한다는 건 참 기쁜 일이니까. 다합에도 소주잔에도 지혜지 도장을 꾹꾹 찍어 담았다.
최근
최근에는 도예를 잠시 멈췄다. 이사를 해서 공방을 새로 찾아야 하기도 하고.
혼자 밥을 먹거나, 누군가를 초대할 때도, 꽃병에 꽃을 꽂는 일상적인 순간들임에도.
내가 만든 접시, 국그릇, 밥그릇에 밥을 먹는 기분, 내가 만든 화병에 꽃을 꽂는 기분은 조금 색다르다.
언젠가 곧 흙내음을 맡으며 흙의 감각을 느끼고 싶을 때 언제고 다시 찾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