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파도에 부응하기 위해 항상 서핑을 나갔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부응하며 살아온 과거날에 대한 후회

by 오지

어릴 때부터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나란 아이는 사람들의 감정을 잘도 읽었던 것 같다. 싫고 좋음이 명백한 아이였지만 밖에서는 거절 한 번 잘하지 못하던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어른들로부터 평판은 좋았다. 말 잘 듣고 성실한 아이. 하물며 내가 기억하던 나의 초등학생 시절과 초등학교 동창이 기억하던 내가 다른 것을 알고 충격을 먹었다.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우울을 생각하는 반면, 동창생은 항상 반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인기도 있고, 밝은 아이로 기억했다. 이 두 개의 인생이 무척이나 이질감이 느껴져 잠깐동안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너무 예민해서 상대방의 감정까지 캐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에서야 알았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른 나의 불안함까지도. 내 반응은 나의 것이고, 상대방의 반응도 상대방 것이다. 하지만 어떤 선이 없이 모든 반응을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항상 불안했다. 상대방 반응을 무의식적으로 살피고 그게 부정적으로 느껴지면 그 부정적인 반응을 만회하기 위해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런 일촉 측 발의 상황은 물론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반응을 떠안아야 했을까. 그 사람의

몫이다 하고 내버려 두면 좋았을 것을, 그 사람의 불안은 곧 나의 불안으로 들고 와서 괜한 자기 파멸과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했었다. 책임감이 큰 것 또한 문제이지 않았을까.


바다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주변의 감정이라 한다면, 나는 모래 위에서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서퍼였다. 모든 파도를 다 타야 했기에. 그렇게 해서 얻는 이득이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에게 나는 파도를 참 잘 타요.라는 인정이었을까, 서핑실력을 늘리기 위한 노력이었을까, 단순히 파도가 일어나면 뛰어나가는 조건반사였을까.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쉼 없는 서퍼는 결국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잠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사달이 난 거고.


모래 위에서 서핑보드와 쉬면서 파도가 일어나고 내려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어도 충분했다. 그러다가 타고 싶은, 그러니까 내가 탈 수 있을 것 같은 파도에만 올랐어도 충분했다. 소중한 사람의 파도라던가, 지켜주고 싶은 파도에만 다가갔어도 충분했다.


모든 사람들 감정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아니 지켜보지 않았어도 충분했다. 모래찜질이나 하면서 뜨거운 햇살 아래 여유를 느끼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도 충분했다. 내 마음에나 신경 써도 충분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우린 다르고, 그렇게 느낄 여유를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