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구제해 줄 ‘왕자님’을 찾고 있었나

난 못해. 라는 패배감이 만든 비참함

by 오지


날이 따뜻해지니 기분이 좋아진다. 길에서 보이는 커플도 많아진다. 몇 년 동안 꽃놀이는 흥미가 생기지도, 계획조차 세우지 않았던 터라 올해도 그냥 지나가겠지 싶었는데 주변 나와 같은 미혼 여성, 혹은 결혼생활에 흥미를 잃은 이들이 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한다. 나 참나. 아무리 짝이 없는 집순이라도 말이지 나에게 이런 동행을 구한다니 적극 ‘환영이다'.


환경에 영향을 쉽게 받는 타입이라,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공기에 마음도 풍요로워진다. 하지만 꽃봉오리가 보이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씁쓸하다. 몇 년 동안 부러움도 외로움도 없이 잘 넘겼는데, 유독 이번 봄은 씁쓸하다. 연애세포가 다 죽었다 생각했는데, 이제 다음 세대에 유전을 넘겨주는 것도 글렀다고 체념했는데, 이상하게 외로움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최근에 추천받아 즐겨본 드라마 ‘은중과 상연’에 이런 장면이 있다. 큰 사랑의 아픔 한 번과 여러 번의 자잘한 만남을 거친 은중에게 회사 동료인 유찬이가 고백한 장면이다.


“난 이제 100 아니면 안 만나.”


평소에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관념을 말로 들으니 가히 충격적이다. 지금까지 연애경력이 몇 번 없는 이유도 이런 이유다. 인생에서 연애를 이 마인드로 바라봤다. 맘에 드는 남자가 아니면 마음이 가지도, 연결되지도, 만나지도 않았다. 30대 중반을 향해가는 자리에서 더욱더 심해져버렸다. 고집이라면 고집이고, 색이 너무 강해졌다면 그렇기도 하고, 가치관이 뚜렷해졌다면 또 그 말도 맞다. 중요한 기로에 서있는 미혼 여성으로서(여기서 말하는 중요한 기로란 나에게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아껴야 함을 말한다.), 가볍게 만나보는 건 당연하거니와, 한 번 만나보는 소개팅자리도 생각만 하면 기운이 빠진다.

이성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사람 보는 눈이 생기고, 무엇보다 잘 맞을 사람도 빠르게 보이고 안 맞을 사람도 단번에 느낀다. 호불호가 뚜렷하고, 색갈이 강한 나라서 더 그렇다. 거기다가 게으름까지 더해졌다(라고 쓰고 체력이 떨어졌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찍부터 일어나 풀세팅을 하고 남자를 만났는데 잘 안되서 에너지가 바닥날 걸 생각하면 그냥 집에 있는걸 택하는거다.





벚꽃 떨어지듯 허한 이 마음에 갑자기


의문이 든다. 왜 나는 남자를 원하는가?


외롭단 얘기를 친구들에게 하면 친구들은 항상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네가 그 정도로 간절하다고?”


나는 이 말의 의미를 몰랐다. 내 나름대로 진심이고, 외로움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주변에 보여지기에 그 정도는 아니란 거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자타공인 일명 혼자 잘 노는 애다. 20대 때는 밖으로 혼자 나돌아 다녔고, 30대에는 집에서 혼자 사부작댄다. 혼자 있어도 심심할 틈이 없다. 20살 이후에는 심심하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친구들이 집에서 심심한데 뭐해라는 말도 이해가 어려웠다. 심심하다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심심하면 아무거나 하면 되잖아.

이렇게 혼자 잘 노는 애다보니, 외로움을 많이 느끼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외부에서 보는 나는 더욱 그랬나보다. '누군가와 함께 하지 못하면 혼자 하면 되지 뭐가 문제'라는 철학 때문에 많은 취미를 혼자 하다 보니, 이제는 혼자가 편하다. 그렇다면, 근데, 왜 나는 남자를 원하는가?


단순히 여자로 태어나 남자를 바란다는 것 말고도 다른 의미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결핍을 느꼈기 때문이다. 단순히 성을 떠나서 다른 결핍이 있었다. 그 결과가 '나를 구제해 줄 왕자님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바로 이전 X가 정말 그런 남자였어서 더 그렇다. 운이 좋게 엑스와 사귈 때, 정말 공주 대접을 받았다. 이게 사랑받는 거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 가치가 더 빛나는 것처럼 느꼈다. 물론 사랑받는 여자는 빛이 난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나로서 충분히 빛나고 있었다. 또한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내 무의식에 멋진 남자가 있어야 나도 빛날 수 있다라는 하찮은 개념이 있었다. 나를 구제해 줄 사람은 멋진 남자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의 뒷말은 나는 구제되어야 하는 불쌍한 여성이라는 의미가 깔려있다. 멋진 남자와 만나서 럭셔리한 옷도 입고, 좋은 곳도 갈 수 있고, 좋은 차도 타고. 물론 그런 남자가 있다면 대환영이다. 문제는 내가 그런 남자에게 의지하고 있다. 그래서 왕자님이 나를 구제해 주길. 그래서 이 못나고, 하찮고, 형편없는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주길!


이 얼마나 슬픈 발상인가. 나는 나로 충분히 멋짐을 안다. 분명히 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발상이 나왔다는 건 조금 슬프다. 환상의 남자는 없지만 내가 나에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은가. 이쁘게 꾸며주고, 맛있는 밥을 사줄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 그런 능력은 평생 가질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다는 패배감도 있지만, 사실은 그런 노력을 하는 게 귀찮다. 결국은 회피였다. 인생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으로부터 회피. 20대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벌어서 남편 외조를 받는 게 꿈이라면 꿈이었다. 그런데 나는 못한다, 이제 못한다,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하다보니 잃어버렸다. 스스로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주변 사람들에게 ‘넌 할 수 있어. 못한다고 말하지 마.’를 남발하며 근자감을 주입시키던 나였다. 그런 내가 이제는 ‘난 못해.’라고 말한다. '지윤이는 한다면 하잖아.' 라고 주변에서 들어도 ‘이제 저는 그때의 제가 아니예요.’라고 말한다. 용기도, 나아갈 힘도 내지 못하는 이 마음이 참으로 안쓰럽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는지. 그래도 이제는 해야 할 것과 못하는 것, 용기내야 할 때와 체념해야 할 때를 구분지을 필요가 있다. 이제 정신을 차릴때이다.


이제 그만. 못하기만 하는 나는 이제 없다. 못할 때도 있지만 잘할 때도 있는 나다. 그러니…, 용기를 내자. 내다보면 습관이 들겠지. 그러다 보면 더 큰 용기도 생기겠지.




남자이야기로 시작해 용기로 끝나는 이 맥락이 독자들은 어이없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게 좋은 동반자를 찾기 위함임을 알아주면 좋겠다. 나를 알아야 자유도 얻는다. 나를 알아야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나를 알아야 더 좋은 연인이 되어 줄 수 있다. 아마 이런 나라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분명히 그렇게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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