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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Apr 14. 2022

핑크맨의 답가 / 볼리비아 수크레에서 만난 춘자

이 글은 춘자의 '너는 내게 핑크맨이야' 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https://steemit.com/stimcity/@roundyround/4kwkns 


 볼리비아 수크레부터 나의 여행의 끝이 실감이 났다. 열 한달의 여행. 지나온 날들이 믿겨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한 달이라는 시간은 장기여행자에게는 내일 모레 바로 집으로 가라는 말처럼 들렸다. 


 춘자와는 다르게 나에게 수크레는 이쁘고, 평화롭고, 적막한 공기에 웃음소리가 하하호호 들리는 풍경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우중충하고, 우울하고, 자기앞의 생을 읽으며 울고, 전망대에 앉아서 울고, 벤치에 앉아서 멍을 때린, 그런 나날들의 연속이였다. 


 첫날에 도착한 수크레에서는 남미 전역에 열리는 축제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물풍선을 던지고, 거품을 쏘고, 무엇을 기념해서 하는건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길거리에 어린 아이들과 어른들도 누구 하나 잡히기만 해봐라 하면서 물총을 쏳아댔다. 사실 이 축제의 진묘미는 볼리비아에 있는 오루로라는 도시인데, 같이 가자는 친구들의 꼬임에도 불구하고 수크레의 소박한 감성을 느끼려 찾아왔었던 터였다. 


 하지만 기대처럼 빛나보이지 않아 실망스러움 한스푼을 들고 도착했던 터였다. 나도 그 무리 안에 뛰어들어가 흥겹게 놀았지만, 그야말로 노는척이였다. 겉으로는 똑같이 웃고있었지만, 속으로는 참담했으니깐. 떨어진 기대감과 다른 도시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 친구들이 생각나기도 했고, 또 나는 한국이라는 막막함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으니...


 여행하면서 남미 사람들이 너무 좋았고, 어딜가도 동양인이라고 챙겨주는 사람들의 정이 너무 좋았고, 전생에 멕시코가 고향이 아니였을까 싶을 정도로 내적 친밀감을 쌓아놓은 상태였는데... 그때부터는 사람들이 이방인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낯설어졌다. 


 이렇게 어둠으로 들어가고 있을때 만난게 춘자다. 춘자는 카레냄새를 풀풀 풍기며 주방의 모든 기운을 본인에게로 집중시켰다. 나는 감자나 당근 조무래기들을 조각내서 볶음밥을 만드는게 다였는데, 그녀는 나에 비하면 미슐랭 레스토랑 수준이였다. 한국 조미료와 소스는 물론이거니와, 가장 놀랬던건 밥솥을 들고 왔다는거다. 가난한 배낭여행자로 가득한 이 남미에 말이다. 이건 가히 가뭄속에서 피어난 오아시스가 아니라 소나기를 만난 기분이였다. 


 장기 여행자에게 있어서 한식이란, 지쳐가는 여행중에 한번씩 먹어주는, 그것도 한식당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울다가도 한식 냄새만 나면 웃는게 한국 여행자다. 그런 춘자는 재료들과 그리고 밥솥을 들고 다닌다는 건 웬만한 고수의 향기가 아니였다. 


 뚝딱뚝딱 요리를 하고 있는 언니 옆에서 조잘대며 내 이야기를 했다. 세계여행을 하고 있고, 나만의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간 것, 실패 좌절한 이야기, 좋았던 여행장소 등등. 그에비해 춘자는 나보다 여행 경험도 많을 뿐더러, 말에서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능숙함이 있었고, 거기에다가 내가 꿈꾸던 노마드의 삶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춘자는 각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한국에 있는 독자에게 잡지형태로 그 도시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데'하면서 전해 듣는 이야기들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의 일이라고 말했다. 노마드의 삶이라니. 춘자는 대담하게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언젠가는 자신의 출판을 내보일거라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계획을 거리낌없이 말한다는건 큰 용기와 확신이라는 것을 안다. 듣는 사람이 비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첫번째고, 실패할지도 모른다는게 두번째다. 실패... 그 실패라는 두려움이 너무도 크기에, 나는 계획이 없다는 말로 둘러데며 말해왔다. 어렸을때 꿈을 물으면 꿈이 10개도 넘는다고 손가락을 세면서 줄줄히 나열하던 내가, 이제는 손가락 세기를 포기한다. 왜냐하면 이루어질지도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꿈을 굳이 마음 아프면서까지 되새김하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춘자는 처음보는 나에게 어마무시한 말들을 내뱉었다. 듣는 청자가 이렇게나 놀라워하고 있었던걸 그녀는 알까.


 연결. 그녀는 나와의 관계에서 연결이라는 단어를 썼다. 춘자와의 만남에서 나는 감히 경외감이란 단어를 선택하겠다. 본인의 출판사에서 다른 작가의 책을 냈고, 본인의 에세이를 내 손에 쥐어준 지금까지도 춘자는 경외다. 이 책의 실물을 보았을때 언니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왔다.


"출판을 할거야."

"내 이야기를 할거야."



 간절하게 믿고, 말하고, 상상하면 이루어진다는 두루뭉실한 이야기가 실제로 자신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을때, 당신은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나는 꿈같다는 표현을 하겠다. 한편의 영화를 본 듯 울컥하기도 하다. 


 춘자는 나의 영적 스승같기도 하고, 친구같기도 한 존재다.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만날때마다 무언가를 얻어온다. 나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샘솓게 한다. 어떨때는 나보다 더 나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열을 내는 모습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해!", "하면 돼!", "그래! 그거야!" 이 말들이 춘자를 만나면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선 항상 어벙벙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듣는 내가 보인다.


 춘자는 그 이후에도 쭉, 계획을 한 보따리 싸들고 들고와서 풀러보인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언니는 형체가 없는 그 물건들을 실제로 만들어 올것이다.


 춘자는 날 본명으로 부르면서도 항상 핑크맨으로 생각한다지만, 사실 나는 언니를 본명으로 불러본 기억도 별로 없다. 작년 이맘때까지만해도 나는 언니 이름이 춘자인줄 알았으니깐. 그렇지만 나는 앞으로도 춘자를 본명으로 부를 생각이 없다. 나에게 춘자는 춘자의 정체성. '그것'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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