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남몰래 어른이 되었다

엄마에게 위로가 된 순간

by Carpe diem



위로 2 / 김지영


열다섯 양갈래 여중생에게
엄마의 부재는 난생처음이라
함부로 넘어져 울 법도 하건만
쉽사리 울 줄을 모른다

서울로 유학 간 언니의 일주일치 찬을 만들고
거울 보듯 똑 닮은 엄마 얼굴 한 번 어루만지다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 남몰래 훔치고
밤하늘 성긴 별 하나를 마음에 담았다

서른다섯 엄마가 된 여중생의
남편을 빼다 박은 열 살짜리 딸아이는
흑백 영정 사진 속 쪽진 엄마 얼굴이 낯설어
고개만 갸웃대다 배시시 웃는다

“엄마의 진짜 엄마란다”

오랜만에 큰따옴표에 담은 엄마가
쑥스럽게도 그리워 울멍울멍
그 떨림이 낯선지 엄마를 와락 끌어안은 채
나직하게 “엄마” 속삭이는 딸아이가 엄첩다


매년 엄마에게 받는 생일상은 정갈하고 한결같아 기다려진다




망각이 취미인 나는 습관처럼 기억을 놓치는 편이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내 진짜 외할머니와의 첫 대면의 순간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설 연휴의 끝자락에 외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남원시 대산면의 소박한 한옥집, 소담스레 내려앉은 하얀 눈과 굴뚝 위 피어오르는 연기까지 온통 새하얀 그 집이 난 참 좋았다.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에게 명절은 늘 고욕이라 서울에서부터 분주했던 차례 음식 장만을 시작으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친척들의 밥상과 술상을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하느라 잔뜩 예민해진 엄마의 미간 주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마법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몸을 녹이려고 뛰어 들어간 구들방에서 엄마를 쏙 빼닮은 흑백 영정 사진을 꽤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보았고 잇따라 들어온 엄마는 아랫목에 앉아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의 돌아가신, 진짜 엄마라는 말을 듣고 인자한 미소와 따뜻한 포옹으로 늘 반갑게 맞아주시던 외할머니는 그럼 누구인지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진짜 엄마’라는 엄마의 말로도 이미 충분했으니까.

엄마는 3남 5녀 중 서열로는 다섯째, 딸 중에는 셋째다.


오빠 둘에 언니 둘, 어리광 피우고 자신만 생각해도 충분했을 셋째 딸 우리 엄마는 가장 철부지 고운 나이에 엄마를 잃었다. 그렇게 엄마는 이해하고 인내하고 희생하는 게 생활이 되어 남들보다 일찍 철이 들었다. 서울로 상경한 큰 이모들과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막내 이모와 달리,


자기주장은 감춘 채
엄마는 남몰래 어른이 되었다.



고작 열 살짜리 철부지였던 내가 엄마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유독 외할머니를 닮은 엄마가 느꼈을 그리움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은 가능했다.

그 후, 엄마의 이야기는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어린 딸은 엄마의 대나무 숲이 되어 어리고 젊은 시절 엄마가 스스로 거뒀던 원망과 후회들을 쏟아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게 아빠를 빼다 박은 무뚝뚝한 맏딸이 엄마에게 최대치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엄마에게는 소중한 엄마가 오랜 시간 부재중이고, 나에게 엄마는 노상 곁에 있는 공기 같은 존재이니까. 있을 때 잘하라는 흔하고 뻔한 말이면 명분은 충분했다.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가장 상처를 주는 존재



그런 엄마에게 내가 위로가 되었던 순간, 엄마의 마음이 이랬다면 좋았을 텐데 지난 시간에 대한 바람을 잊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