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victus Dec 31. 2020

물을 퍼내는 일

지인이 글을 하나 보내줬다. 어느 투자사 대표님의 글인데, 올해 4월 코로나가 심각해졌을 쯤 작성된 글이다.

본인의 예전 창업경험 중 어려웠던 시기를 버티고 버티며 결국 살아남은 과정에 대한 내용이었다. 글을 읽는 내내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 없다. 그중에서도 한 글귀가 와닿는다. 회사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현금이 바닥나는 상황을 표현한 것인데, 아래와 같다.


"마치 물이 2/3 정도 차올라서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가장 중요한 거는 모든 선원과 승객이 물을 배 밖으로 퍼 내는거지, 배가 목적지 쪽으로 잘 가고 있는지 아니면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는지는 크게 상관없는 상황"


오늘은 2020년 12월 31일, 지금 시각은 22시 00분이다. 새해를 맞이하기 직전, 운영하는 호스텔 1층의 펍을 거리두기 2단계로 인해 21시에 문을 닫고 글을 쓰는 중이다. 남아있는 빈 객실에서. 베드라디오란 배에서 가득찬 물을 퍼내다가 2020년 한 해가 다 지나갔다. 




12월의 마지막 주, 텅 빈 객실들을 당장 팔아보기 위해, 혹은 미래의 객실이라도 당겨 팔아보기 위해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저렴하게 일주일/보름/한달 단위로 홍보도 해보고, 출장이 잦은 회사들을 위한 B2B 숙박권도. 운영대행을 하는 호텔의 객실엔 듀얼모니터와 컴퓨터 책상까지 세팅하며 사진을 열심히 찍어 홍보도 했다. 그렇게 12월을 보내고 2020년의 마지막날을 맞이하는데 여전히 배에는 퍼내야할 물이 많다. 이 배엔 이제 선원도, 승객도 얼마남아있지 않다. 물을 퍼낼 손도 부족하다.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가 취소되고, 코로나로 상황이 더 악화되고, 여러 관계들로부터 오는 압박과 질문들에 괴로웠을 때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생각 혹은 희망 때문이었다. 그런데 새해를 앞둔 마지막주를 보내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뭘 해야할까'


숙박업, 음식점을 하고 있는데 제주도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1월 초면 변할 줄 알았던 상황은 오히려 길어질 듯 하다. runway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활주로 가장 끝에서 매일매일 조금씩 활주로를 늘려가는 상황을 이어왔으니까.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코로나 이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다시 한번 내 인생을 걸어볼 수 있는 새로운 방향. 그런 방향만 있다면 버티는 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1월 1일부터 3일까지 주말간은 2021년 나의 희망을 만들어낼 시간이다. 머리 속으로 떠올리기만 했던 여러 갈래의 시나리오들을 쓰고, 그리고, 정리해보자. 그리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물을 퍼내다보면 배는 떠있을 수 있으나, 물길 위 흐름따라 흘러가다보면 어느새 절벽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젠 다시 하늘의 별을 보고, 망원경을 꺼내 멀리 바라보며 확실히 키를 잡아야 할 때이다. 그려보자. 새로운 비전을.

매거진의 이전글 저녁이 있는 연말을 보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