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공기가 달랐다. 주변에 들리는 소음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환경미화원 분들의 빗자루 소리, 출근하는 차 소리가 났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리고 나는 이상하게 일찍 깼다. 오전 8시 40분. 전 날 (?) 이상하게 무서워서 다섯 시 까지 못 자고 있다가 무한도전을 무한 재생으로 틀어두고 겨우 잠들었다. 그런데 고작 3시간 만에 일어난 것이다.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는데 엄마한테 문자가 와있다.
‘일어났니?’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했다. 신호가 한참을 가도 엄마가 안 받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끊지 않았다. 끊으면 안 되는 전화니까. 전화를 받은 엄마는 작은 고모랑 이야기를 하더니 뭘 좀 간단히 챙겨먹고 운전은 절대 하지 말고 ktx타고 오라고 했다.
“너무 급하게 오지말고.”
그렇게 일어나서 내가 씻고 옷 입고 역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해서 가장 빨리 청주로 갈 수 있는 ktx 10시 20분 차를 예매했다. 급하게 씻고 나와서 로션이랑 선크림만 대충 바르고 공부방 담당 센터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는 지금 청주를 가야하고, 3일간 수업을 하지 못 하니까 엄마들에게 안내 좀 부탁한다고 했다. 전 날 혹시 내가 갑자기 청주를 가야할지도 모른다고 미리 이야기를 해놨기 때문에 수월했다.
나는 논술전문 공부방을 운영하는 공부방 원장이다. 할아버지가 임종을 앞둔 그 순간에도 나는 내 밥벌이 걱정을 해야했다. 엄마들에게 최대한 기분나쁘지 않으면서 나의 상황을 알려주려고 나름 고민을 해서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그 때 미처 확인하지 못 한 것이 있었다. 앞으로 3일간이라고 쓰거나 ‘일주일’ 이라고 썼어야 했는데 ‘오늘’ 이라고 써버렸다. 거기다 센터장에게 보낸 명단에도 구멍이 있었다. 한 아이를 빼먹은 것 이다.
아이는 할아버지를 입관하는 날 수업이었다. 생전 그런 건 처음 본데다 이제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확인한터라 나는 정신이 반 쯤 나가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힘들었었다. 한 참 시간이 지난 후에 겨우 정신 차리고 핸드폰을 잠깐 봤는데 전화랑 문자가 와 있었다.
‘선생님. 전화주세요.’
‘선생님. 우리 아이가 집 앞에서 기다렸다는데 오늘 까지 안 계신건가요?’
엄마 문자를 보고 내가 대응할 정신이 아니라 센터장에게 부탁을 했지만 다시 나에게 토스가 됐다. 엄마랑 내가 직접 소통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엄마에게 나름 정중하게 문자를 보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청주에 와 있습니다. 내일까지는 수업이 어렵습니다.’
이 문자에 엄마는 내가 ‘오늘’ 이라고 잘못 쓴 문자를 캡쳐해 보내면서
‘이렇게 통보하시는거 기분 나쁘네요.’
‘우리 아이가 오늘 그 앞에서 5분이나 기다렸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선생님 사정이고 기다린 우리 아이 생각은 안 하나요?’
아이의 엄마는 문자를 연달아 세 개를 보냈다. 내가 여기에서 할 말은 전화로 따지는 것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아 센터장에게 문자를 캡쳐해서 보내면서 해결해주기를 요구했다. 장례중인 사람에게 이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 것도 화가 났고, 장례 중 인거 뻔히 알면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그건 네 사정이라고 말 하는 그 엄마가 너무 싫었다. 할아버지 장례가 끝난 후에 그 아이는 그만두는 걸로 합의를 봤다. 그 엄마가 하고 싶다고 했어도 내가 안 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먼저 그만두겠다고 해줬다. 힘들이지 않고 처리해줬다.
그 때 이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 엄마의 무례함은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상처였다. 내 조카가, 내 누나가, 내 동생이, 그리고 내 딸이 그런 취급을 받는 걸 모두가 봤다. 그런 무례함에도 한 마디 하지 못 하고 화를 삼키는 걸 우리 할아버지영정 앞에서 그대로 보여줬다. 어릴 때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 엄마 아빠가 일 하느라 바빠서 나랑 오빠를 둘 다 챙길 수가 없어서 학교 다녀야 하는 오빠는 엄마 아빠가,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봤다. 나는 그래서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유치원을 다녔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놀림을 받거나 싸워서 오면 할아버지가 유치원으로 쫓아갔다. 사실 정말 유난스럽고 그러면 안되지만 어릴 때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정말 든든했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 까지 내가 할아버지의 손녀라는게 정말 든든하고 좋았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빽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른 날. 그 앞에서 나는 울면서 화를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 할아버지가 그 상황을 지켜보며 많이 속상해 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만두고 싶었다. 엄마들의 되먹지 못 한 이런 무례함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회원 한 명 놓치기 싫어서 선생님에게 무조건 굽히라고 말 하는 센터장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선생님으로서 마땅한 존중을 받고 싶었다.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의 지식과 노하우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엄마들이 돈을 주고 교육을 하고 나는 그 돈을 받는 사람인 건 맞지만 돈 생각하면서 교육을 한다면 나는 그게 어떤 분야든 누구를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으로서의 사명감이 따라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나의 지식과 나의 노동력에 비하면 그 돈을 한없이 적게 느껴지니까.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고, 가르치면서 나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걸 다 알아달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기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갖춘 사람과 일 하고 싶었다.
작가를 그만두고 처음부터 새로운 일을 찾을 생각은 아니었다. 조금만 쉬다가 다시 작가 일을 할 계획이었다. 다시 방송작가로 돌아갈 때 까지 건강도 돌보고 하고 싶던 공부도 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내가 아프다는 걸 알았다. 방송작가 10년 하는 동안 내 몸은 머리부터 발 끝 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게 일을 쉬고 나니까 한꺼번에 터진 것 이다. 어쩌면 내가 암 일지도 모른다는 청천 벽력같은 이야기를 듣고 나의 미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옆에서 할 수 있는 일이면서 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노하우를 어린 친구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쉬울 것 같았다. 어차피 알고 있는 거고 나는 글 쓰는 걸 제일 잘 하니까 이것 만큼 적격인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이 일을 잘 해냈다. 그 전에는 몰랐던 나의 적성을 찾은 것 같았다. 누구를 가르치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잘 했다. 나보다 수학을 못 하는 친구에게 수학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글을 잘 못쓰는 친구들에게 자기소개서를 잘 쓸 수 있게 알려주기도 했다. 대학교 학보사 때도 후배들에게 기사 쓰는 걸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그러니 이렇게 잘 할 거라는 생각 역시 할 수 없었다.
일을 그만두고 싶은 이유가 오롯이 그 엄마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어떤 회사에 소속된 업체이기 때문에 실적의 압박도 있었고, 여러 엄마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생각보다 너무 힘든 것도 이유였다. 방송을 하면서 일반인 출연자들도 그 까탈스럽다는 연예인들 비위도 잘 맞춰왔기 때문에 힘들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돈을 받는 입장이지만 엄마들은 나에게 돈을 주는 입장이었다. 그게 그렇게 다를 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그게 얼마든, 단 돈 천원이든 만원이든 십만원이든 누구에게 돈을 쓰는 사람은 갑이 되고 그 돈을 받는 사람은 을이 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원리를 나는 공부방을 하면서 겨우 깨달았다. 엄마들은 자기들이 쓴 돈 만큼 얻어가기를 바랬고 그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돈을 줬으니 그 만큼 해야한다.’ 라는 생각은 나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많은 사교육을 하는 교사들에게 상처가 된다. 알게 모르게 엄마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안 그래도 굉장히 지치고 힘들었는데 할아버지 장례도 이해해주지 못 하는 엄마를 보면서 너무 허무해진 것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했고, 어쩌면 이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엄마들과의 친분이 우선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후로 10개월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는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 때와 지금 회원 수가 크게 차이는 없지만 나의 마음은 조금 달라졌다. 아직도 나를 속상하게 하는 이상한 엄마들은 있고, 그 엄마 때문에 속상해서 잠을 못 자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때 보다는 굳은살이 조금 생겼다. 상처를 계속 받아서 무뎌졌다기 보다 나를 믿어주는 엄마들과 아이들 덕분에 단단해졌다. 고참 선생님들만 듣는다는 ‘선생님만 믿을게요.’ 라고 고맙게 이야기 해 주는 엄마가 생겼고, 명절 때 마다 선물을 보내주는 엄마들도 생겼고 아이가 글을 잘 쓰게 됐다며 감사인사를 하는 엄마들도 생겼다. 밥 못 챙겨 먹을 것 같다고 간식을 챙겨주는 엄마도 생겼고 밥을 챙겨서 보내주는 엄마도 생겼다. 엄마가 영어, 수학이 중요하다며 그만두라고 하는데도 선생님이 좋아서 그만두기 싫다고 하는 아이들도 생겼다. 그런 마음 하나 하나가 나에게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힘을 줬다. 그래서 코로나 19로 일이 힘들어도, 가끔 엄마들이 상처를 줘도 많이 아파도 이 일을 포기할 수가 없다.
사실 나는 아직도 가끔 방송이 하고 싶다. 다른 생각을 할 시간도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방송이 나는 재미있다. 몇 날 며칠 밤을 새고 나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때가 있지만 그래도 종편이 끝난 후에, 녹화가 끝난 후의 그 희열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방송을 하는 사람들끼리 그걸 방송뽕 이라고 한다. 방송 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남 다른 희열, 그 희열 때문에 힘든 일을 참고 그 시간을 기다리는걸 보면 흡사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 같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아직 그 뽕을 못 잊는 거겠지. 아직도 그 느낌을 찾는 거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 하는 이유는 내가 떠난 후에 남겨질 아이들도 아니고, 배신감을 느낄 엄마들도 아니다. 희열을 쫓아 방송에 돌아갔다가 나이가 들어 홀로 남겨질 나 때문이다.
이 일을 선택한 이유가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건 그 때 잠시 뿐이었고 지금은 아니다. 이 일은 다른 일 만큼 많이 힘들고, 조금도 쉽지 않다. 하지만 방송과는 다르게 내가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앞으로 혼자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는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나이 많은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참는다.
조금 있으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년이 된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참석하지 못 한다. 그 날은 평일이고 평일에는 수업이 있으니까. 차로는 3시간 ktx로는 2시간이나 걸리는 그 곳에 왔다 갔다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정말 사랑하고 보고 싶은 할아버지이지만 그 때도 지금도 내 밥벌이가 달려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 가끔 일이 힘들 때 마다 할아버지를 불러본다. 그러면 힘이 생긴다. 내 평생 나의 자부심이었던 우리 할아버지. 항상 내가 제일 예쁘다고 제일 똑똑하다고 얘기해주던 할아버지.
“할아버지. 회원 좀 팍팍 늘게 해줘. 진상 엄마들 좀 혼내줘, 나 너무 힘들어.”
돌아가시고 안 사실이지만 할아버지는 모든 손주들에게 “네가 제일 예쁘다. 네가 최고다.” 라고 하셨단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다 내가 최고인 줄 알고 살았다. 립서비스가 최고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