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

밥솥이랑 둘이 살아도 괜찮아요.

by SooAh

밥솥을 바꿨다. 처음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할머니가 쓰시다가 넣어둔 걸 받아왔는데 아무래도 몇 달 동안 창고에 있던 것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잔고장이 많았다. 거기다 혼자 무려 10년을 살았는데, 가스레인지 바로 옆에 밥솥을 두는 바람에 메뉴 선정하는 조그 셔틀이 녹아서 자꾸 떨어졌다. 속 뚜껑 패킹도 오래 보관하면서 고무가 삭아서 씻으려고 뚜껑을 뗐다가 다시 넣는데 애를 먹었다. 나는 그 짓을 몇 번 반복하다 덮개는 씻지 않기로 했다. 패킹을 바꾸면 될 일인데 그러기 싫었다. 아마 그 때부터 밥솥에 정이 떨어졌던 것 같다. 그 핑계로 바꾸고 싶었겠지.

혼자 살면서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는 매 끼니를 챙겨먹는 거다. 그래도 처음 혼자 살 때는 엄마가 준 반찬과 내가 만든 것 하나, 이렇게 꺼내놓고 나름 잘 차려먹었다. 그게 재미있었다. 혼자서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도 있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차리는 것이 귀찮았고 만드는 것이 귀찮았고 다 먹은 후의 설거지는 최고로 하기 싫었다. 그래서 사먹기 시작했다. 한 번 사먹으니까 정말 편했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한 상이 완성됐고 설거지를 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몸은 안 좋아졌다. 속이 더부룩했고 많이 먹어도 힘이 없었다. 그래서 밥솥을 주문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서. 내가 나를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챙겨주지 않으니까. 나를 챙기는 가장 첫 번째로 나는 밥솥을 샀다.

밥솥은 나의 많은 걸 변화시켰다. 먼저 새하얗고 예쁜 밥솥을 주방 가장 좋은 자리에 앉혀주고 싶어 주방을 정리해야만 했다. 칙칙했던 옛날 밥솥은 내려놓고, 그 자리에는 최근에 산 하얀 에어프라이어를 올려놨다. 에어프라이어가 있던 자리에는 칙칙한 그레이 색 전자레인지를 올려두고 전자레인지가 있던 명당자리에 새 밥솥을 올려놨다. 칙칙한 친구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새하얀 친구들이 메인 자리에 올라와있으니 주방이 환해진 것이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자꾸 자랑하고 싶어졌다. 마저 자랑을 하고 싶어진 나는 오늘 하얗고 예쁜 전기주전자와 노란색 커튼을 주문했다.

그래. 자랑이 하고 싶어서.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몰랐다. 이런 거 하나도 자랑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걸. “이 커튼 예쁘지? 이 주전자 여기 놓으니까 정말 좋지?” 하는 질문을 하고 “정말 잘 어울린다.”라는 대답을 듣는 일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혼자 살면 질문과 대답을 모두 나 혼자 해야 한다. ‘와 밥솥이 여기에 있으니까 다른 집 같네.’ 라든가 ‘여기에는 하얀색이 어울리겠지?’ 라든가 또는 ‘나 정말 잘 한 것 같아.’ 라든가 모두 혼자 대답하고 혼자 감탄한다. 친구들에게 사진으로 물어보고 사진으로 호응을 유도하기는 하지만 바로 옆에서 이야기해주고 감탄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요즘 들어 여실히 느낀다.

작년 여름, 부산에 큰 태풍이 두 개나 지나갔다. 평생 태풍이나 자연재해와 먼 곳에서 살다가 자연 재해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는 도시에 온 나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밖에서는 바람소리가 ‘휘잉휘잉’ 나고 창문이 흔들리고 불은 꺼졌다 켜졌다 하고 방에서는 물이 샜다. 그 걸 두 번이나 겪었다. 밤 새 한 숨 못자고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옆에 이 무서움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방법이 결혼밖에 없다면 나는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결혼을 마음먹고 벌써 6개월이 흘렀다. 그 때 샀던 새햐안 밥솥은 이제 생활을 때가 묻어 조금 헌 밥솥이 됐지만 여전히 열심히 밥을 짓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현미와 찰 현미를 반반씩 넣고 밥을 지었다. 냉장고에 있던 묵은지를 씻어 무치고 소시지를 구워 한 상을 차렸다. 비록 “와 맛있겠다.” 라든가 “잘 먹을게.”라는 인사는 여전히 없지만 내가 나에게 감사하며 맛있게 밥을 먹었다.

아직도 가끔 힘든일이 있거나 무서운 날이면 '그냥 결혼을 할까?' 하고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다시 괜찮아진다. 역시. 나와 결혼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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