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새벽, 불 파티

원두를 태워먹었다.

by So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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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잡곡을 담아뒀던 통이 비어있는게 생각이 나서.

문득 작년에 담아뒀던 씨리얼통이 생각이 나서,

나는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에 ‘통을 비우고 씻어야겠다’ 생각을 했다.

통을 씻으려고 보니까 작년에 사뒀던 분쇄원두가 보였고,

이걸 살짝 말려서 (오래돼서 이미 말라있었을텐데ㅠㅠ) 쓰레기통 밑에 깔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 생각하는 거지만 이걸 그 새벽에,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에 할 일은 아니었다.


나는 1년도 더 된 묵은 분쇄 원두 새 팩을 뜯어서 (무려 900그램이나 됨) 에어프라이어용 종이 호일을 두 장 깔고 그 위에 원두를 부었다. 스스로 '이 정도면 적당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적당히 부었다. 그리고 난 뿌듯해하며 원두를 전자레인지에 넣었고 강에 30초로 레버를 맞추고 돌렸다. 원두는 돌리고 나면 좀 식어야 하니까 그대로 두면 되겠지? 하고 바로 꺼내놓았던 잡곡통을 씻었다. 세제를 브러시에 묻히고 통을 닦는데 어디선가 나는 향기로운 커피 냄새. 커피 중독자인 나에게는 정말 향기로운 냄새였다. 그런데 점점 그 냄새가 심상치 않았다.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은 그 시간 동안 향기로운 커피 냄새는 매캐한 냄새로 변했고 난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일단 전자레인지를 중단시켜야 돼' 하며 전자레인지로 손을 뻗는 순간 완료됐다는 종소리가 들렸고 전자레인지에서는 정체모를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혹시 안에서 불이 났나?'

무서운 마음에 전자레인지 문을 열었더니 요술 램프에서 지니가 나오듯이 연기가 주방을 집어삼켰다. 눈을 뜰 수가 없었고 연신 기침이 나왔다. 그때 든 생각은 '불났다.'였다. 거기를 피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일단 불을 꺼야겠다는 생각에 (대체 무슨 생각임?) 손에 물을 받아서 전자레인지 안으로 뿌렸다. 천만다행으로 불꽃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고 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손에 물을 받아서 다시 한번 뿌리고 고무장갑을 벗고 주방을 빠져나왔다.


내가 이 집을 처음 결정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이거였다. 거실과 주방이 분리돼 있고 주방에 따로 문이 있는 이 집을 보면서 나는 채광도 채광이지만 '이 집이다'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행스럽게 주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지만 이미 거실까지 연기가 잡아먹은 후였고 난 온 집에 있는 문과 창문을 다 열었다.

이건 내가 두 번째 하는 후회다. 덕분에 온 집에 탄내가 진동을 한다.

연기는 금방 빠져나갔고 마음도 안정이 됐다. 그러니까 주방 상황이 궁금해지더라. (제발 가만히 좀 있어) 다행히 주방도 연기는 웬만큼 빠져나갔고 주방 문을 열자 더 빠르게 연기는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 사는 사람이고 나 말고는 이 사태를 수습할 사람이 없으니까. 연기가 빠져나간 전자레인지를 보니 아직도 열 받아 연기를 내뿜고 있는 원두가 보였다. 원두를 조심히 꺼내 물을 다시 한번 뿌려서 완전히 식혀주고 주방 환풍기를 켰다. 이건 아까 켰어야 했는데 확실히 정신이 없기는 했었나 보다. 그리고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아까 씻던 통을 마저 씻어 엎어두고 원두는 식어야 하니까 창문 앞에 두고 거실로 나왔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났더니 그제야 나는 타는 냄새. 온 집안에 그리고 내 몸에서 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직 겨울이라 창문을 계속 열어두었더니 찬 공기와 탄 냄새가 묘하게 겹쳐서 내 콧 속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나 이 냄새 맡아본 적이 있다.

나에게 아주 익숙한 냄새다.





우리 할아버지는 꽤 오래 소를 키우셨다. 내가 기억을 하는 그때부터 할아버지 댁에는 외양간이 있었고 할아버지는 그 소들의 주인이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0년 전까지 소를 키우셨는데 정말 소를 키우는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소 밥을 챙기셨다. 소들의 아침은 속이 편한 죽이었다. 사실 말이 죽이지 볏짚을 뜨거운 물에 끓여서 주는 거였는데 그 때문에 외양간 한편에는 아궁이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소들의 아침을 해주셨다.

나는 한 번도 소밥을 같이 준 적은 없지만 할아버지가 ‘밥을 주고 오셨구나’ 하는 건 알 수 있었다. 한참 단잠에 빠져있을 때 콧속을 간질이던 새벽녘의 이슬 냄새에 묻어있는 탄 내. 이 냄새가 나면 ‘아 할아버지가 소밥을 주고 오셨 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냄새가 점점 가까워오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자는 내 옆에 앉아서 내 발을 쓰다듬으셨다.

“발도 여뻐. 내 새끼.” 하면서.

할아버지는 그렇게 내 발을 한 참을 쓰다듬고는 이불을 발끝까지 폭 덮어주셨다. 난 원래 발에는 이불을 덮지 않지만 그때만큼은 이불을 차 버리지 않고 가만히 덮고 있었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를 아니까. 그 마음을 기억하고 그 냄새를 기억한다. 그리고 이렇게 문득문득 비슷한 냄새가 날 때, 비슷한 일을 겪을 때 꺼내어본다.


"네가 제일 여뻐. 손도 여쁘고 발도 여뻐."라며 띄워주던 할아버지는 이제 내 곁에 없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기억하고 있으니 됐다. 이렇게 추억할 것들을 만들어 주셨으니 아주 감사하다.




연기는 빠져나갔지만 집에는 아직도 원두 탄 냄새가 진동을 한다. 어제부터 쉬지 않고 공기청정기를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환기를 시켜도 잘 빠지지 않는다. 행여나 아이들에게 나쁜 공기를 마시게 할까 걱정이 됐는데 다행히 아이들은 크게 이상한 걸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작 원두 탄 내 때문에 그만두지는 않겠지만 코로나 여파로 학생수가 많이 줄은 터라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갔고 시간이 지나면서 냄새도 옅어지겠지. 괜찮겠지.


아. 불나면 대박 터진다는데 혹시 대박 터질 징조인가?

드디어 파티인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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