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특별한 생일파티. 내 편 맞지?
하얀 눈이 펄펄 내려 소복이 쌓이던 한 겨울의 어느 날, 앞에서는 할아버지가 눈을 밀고 뒤에서는 택시가 거북이걸음을 하며 겨우 병원 앞에 도착했다. 새벽부터 진통을 시작한 터라 엄마는 녹초가 되어있었고 앞에서 눈을 밀던 할아버지는 기진맥진한 채로 손녀딸을 기다렸다. 그렇게 태어난 게 나다. 이 이야기를 내가 내 생일날마다 듣는다. 할아버지 살아계셨을 때는 물론 돌아가시고 난 바로 다음 해에도 그리고 올 해도 나는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는 딸이라는 소리에 너무 좋아서 그 병원에 (작은 병원이었다고 한다.) 있는 간호사들에게 팁을 주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정말 신기하게도 수능 한파처럼 내 생일만 되면 눈이 오거나 엄청난 한파가 찾아왔다. 한 겨울이니 춥거나 눈이 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니 생일만 되면..’이라는 단골 멘트다.
어렵게 태어난 나는 자라는 내내 생일잔치를 항상 성대하게 치렀다. 일 때문에 바빠서 자주 놀러 가지도 못 하고 밥도 같이 못 먹었던 아빠가 그 날 만큼은 큰 케이크를 사 와서 함께 파티를 해줬다. 그리고 항상 좋아하는 인형을 선물로 받았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집에 인형이 정말 많았다. 아빠는 내가 인형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실제로도 좋아했지만) 특별한 날에는 무조건 인형을 사 왔다. 그게 아빠만의 사랑의 표현이었을 거다.
나는 엄마가 사준 새 옷을 입고 크고 화려한 케이크 앞에서 아빠가 선물로 준 인형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난 지금 사진 찍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마 어릴 때 너무 찍은 탓이겠지. 나이가 들고서도 방학이기 때문에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놀 수 있었고 일을 할 때는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거나 특별한 날을 보냈다. 내 생일은 언제나 그랬다.
그런데 올 해는 아니었다. 코로나 때문에 오가는 게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 누구를 오라고 할 수가 없었다. 미역국도 즉석식품이었고 밥도 하루 전날 져놓은 그대로였다. 그나마 엄마가 먹으라고 싸준 소불고기가 생일 기분을 내줬다. 그리고 친구들과 지인들이 보내준 축하 문자가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래, 꼭 성대한 파티가 아니면 어때. 이렇게 매 해 내 생일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며 나를 위안할 뿐이었다.
짧게 지나간 내 생일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누구는 나가서 드라이브라도 하라고 하고, 누구는 쇼핑이라도 하라고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당장 다음 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영세사업자니까. 코로나로 그만둔 학생들을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생계가 위협받는 지경이니까.
다른 날처럼 차근차근 시간표대로 수업을 진행하고 중학교 2학년 아이들 수업을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아이들이 오지 않았다. 사실 아이들이 2주 전쯤 내 스케줄러에 붙은 스티커를 보며 뭐냐고 물어서 내 생일이라고 알려주었었다. 그때 아이들이 “그 날 저희가 파티해줄게요.” 하기는 했었는데 내가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스물 스물 그 날의 생각이 떠올랐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오지 않고, 자꾸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모르는 척 왜 오지 않냐고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저 갑자기 생리가 터져서요. 여기 화장실에 왔어요. 금방 갈게요.”
셋이? 남자애도 있는데 셋이 동시에 늦고 화장실에 갔다고? 여기로 안 오고 굳이 공중화장실을 찾아갔다고?
머릿속에서는 나에게 연기가 필요한 시간이라고 알림을 주고 있었다.
내 예감이 맞다면 아이들은 2주 전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고, 그래서 오늘 셋이 만나 내 생일파티를 준비하느라 지금 허겁지겁 오는 중일 거다. 아니면 이 앞에서 초에 불을 붙이고 있거나.
이런 고민을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케이크에 ‘I LOVE YOU' 초를 꽂고 불을 붙여서 조심조심 들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슬로로 보이는지. 이미 예상을 했는데도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마음일까. 고맙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는데 그걸 무언가 하나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계속 고맙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겨우 케이크에 초를 끄고 소원까지 빌었더니 이번에는 작은 상자를 건넨다. 상자 안에는 당 떨어질 때 먹으라고 젤리와 초콜릿, 그리고 마카롱이 들어있었다. 거기에 내가 갖고 싶다고 한 손가락 모양 가르침대. 수업을 하다가 지나가는 말로 ‘언제 마트 가면 그거 사야겠다.’ 고 했는데 그걸 기억하고 사 온 거였다.
방송작가를 접고 선생님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아는 피디와 작가들은 다 그랬다.
너 뭐 하는 거냐고.
“작가님 미쳤어?”
라고 하는 피디도 있었고, 중간에 연락해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는 작가도 있었다. 나 역시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며칠 전에도. 사실 나는 매일 그 생각을 한다. 내 기대만큼 학생이 많지 않아서, 기대만큼 돈을 벌지 못 해서. 기대만큼은커녕 기본적인 생활도 어려울 만큼 되지 않는 돈벌이 때문에 나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방송작가 시절에는 느낄 수 없던 그런 것이 있다. 누군가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얻고 있다는 것, 누군가가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최고라고 말해주는 것, 내 말에 울고 웃으며 내 반응을 기대하는 것. 이런 건 방송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방송은 늘 치열했고 경쟁이 동반됐으며 나를 믿어주면서도 나를 평가했다.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나를 믿어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들에게 생일파티를 받고 나는 여기저기에 소문을 냈다. 다시는 없을 소중한 기억이면서 자랑하고 싶은 기억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일은 없겠지. 그래도 괜찮다. 나를 좋아해 주는 학생들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좋은 날을 함께 하고 싶은 학생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니까.
미안해. 선생님이 자꾸 돌아가고 싶어 해서.
고마워, 우리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