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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n 08. 2022

지금 막 퇴사했습니다.

1편


지금 막 퇴사했습니다.


남들 눈에는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아이 ‘뒷바라지’를 위해 경력 단절을 선택한,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한 워킹맘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선택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다르게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고 싶었다. 지금의 내가 원하는 걸 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아이를 낳고 7년째 바라 왔던 삶을 살고 싶었다.



코로나 때문에, 코로나 덕분에


첫 아이를 임신한 순간부터 고민은 시작되었다. 남에게 맡기기는 싫고 아이가 돌이 될 때까지 돌봐주시겠다고 나선 친정 엄마에게는 죄송했다. 그렇게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직장인과 엄마의 역할을 ‘반반’ 나눠서 하며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자책이 항상 뒤따랐다.


2022년 새해가 되자 코로나19 신종 변이 오미크론이 무섭게 퍼져 나갔다. 친정 부모님으로부터 육아 독립을 선언하며 서울로 이사 온 지 1년 반. 코로나19는 잦아들 기미가 없었고 이젠 정말 내 숨통을 조이는 것만 같았다. 첫째가 유치원 졸업을 앞둔 2022년 2월 중순에는 매일 기록을 경신하는 일일 확진자 수를 확인하며 걱정과 근심의 날들을 보냈다. 감사하게도 무사히 졸업식은 참석했지만 확진자 수는 계속 늘었고 3월 2일 초등학교 입학식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걱정과 근심, 초조함은 더 커져갔다.


유치원 카톡이 올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던 날들의 연속. 이제 2일만 더 유치원 종일반에 나가면 첫째는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두 아이 등원 준비를 마치고 서둘러 집 밖을 나서려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유치원이었다. 둘째 종일반에 첫 확진자가 나온 것이다. 오늘 유치원은 전체 휴원하며 아이의 코로나 검사 결과를 보내 달라는 연락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빠르게 가족 모두 자가진단 키트를 하고서 우선은 음성임에 안도하며 곧바로 회사에 연락했다.


가족이 밀접 접촉자인 경우 재택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상사는 나의 재택이 못마땅한 듯했다. 자신도 두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한 공간에서 일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잘 알아서 일까. 모두가 겪어보지 못한 팬데믹 시대.. 내 가족을 지키고 또 혹시 모를 감염 가능성으로 동료들에게 피해가 될까 재택을 말한 나의 마음은 헤아려지지 못했다. 코로나19의 지속으로 회사도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최선을 다해왔던 그동안의 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 회사에서 쌓아온 9년의 신뢰가 한낮 먼지보다 가벼웠구나.' 오랜 걱정과 불안 속에서도 애써 움켜쥐고 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신중한 성격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내 기준에서 아닌 건 아닌 것’이 확실한 사람이다. 나는 아주 오래 고민해온 직장인과 엄마의 ‘반반’ 역할을 끝낼 때가 왔으며, 그건 바로 지금이라고 확신했다. 마음이 울렁거렸지만 ‘재택이 아닌 연차’로 정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울렁거리던 마음이 순식간에 큰 파도를 만들어 나를 덮쳤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첫 아이를 임신한 순간부터 항상 내 마음속에 있었지만 꾹꾹 눌러왔던 모든 마음들이 터져 나왔다. 3개월의 출산 휴가와 3개월의 육아 휴직 후 복직하던 때, 아이가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픈 아이를 돌보느라 무릎과 허리가 자주 아팠던 엄마를 지켜볼 때, 팬데믹 상황에서도 다른 선택지 없이 유치원에 보냈을 때.. 그때그때마다 일렁이던 마음들이 큰 파도를 만들어 나를 덮쳤다.


목 놓아 울던 나를 달랜 건 두 아이들이었다. 엄마의 큰 울음에 아이들은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첫째는 어지럽혀진 거실을 치웠고, 둘째는 자꾸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더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엄마의 자리가 또 한 번 버겁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결국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건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가장 ‘쓸모’ 있고 ‘가치’ 있는 자리


한바탕 마음의 소란이 지나고 난 후 남편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지금 내가 가장 쓸모 있고 가치 있다고 느끼는 ‘엄마’의 자리에 있기로 했다. 치킨도 ‘반반’ 시키면 그 끝이 항상 아쉽지 않나? 뭐든 하나에 집중하는 게 후회가 없다. 12년 동안 ‘직장인’으로 살았고 그중 7년 가까이 직장인과 엄마 ‘반반’으로 살았으니 이젠 좀 다르게 살아 보기로 했다. 지금 내가 가장 원하고 또 사랑하는 아이들이 원하는 엄마의 자리에서 충분히 더 오래 있기로, 있어 주기로 했다. 이걸 쉽게 ‘경력 단절’ 네 자로 요약하기엔 좀 억울하다. 내 삶은 단절되지 않았다. 이제 막 다른 길, 아니 하나의 길로 들어선 것뿐이다.


그 일이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모두 코로나19 확진이 되었다. 유치원에 가지 않고 연차를 낸 그날 저녁 둘째는 경미한 감기 증상이 있었고 그로부터 3일 후 첫째는 고열이 났다. 3월 2일 입학식 아침 PCR 검사 양성 결과를 받았고, 그렇게 조바심 내며 걱정했던 입학식 참석은 결국 ZOOM으로 대신해야 했다.


내가 재택 치료를 끝내고 출근할 때 즈음 회사에서도 확진자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그 이후 거짓말처럼 사무실 직원들 절반 이상이 확진되었다. 내가 퇴사하던 날에도 절반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계속 회사에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반반’의 애매모호함에 고통받으며 애써 참았을지 모른다. 나는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라 코로나19 덕분에 퇴사했다. 이런 계기가 아니었다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결단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코로나19지만 내가 더 선명하게 지금의 나를 바라보고 주위를 둘러보고 내가 갈 길을 정하는데 도움을 준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 딸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 수고했어.


코로나19에 걸리고 퇴사까지 3월 한 달이 꿈처럼 지나고, 막연했던 퇴사일이 다가왔다. 좋은 동료들이 함께 였기에 오래 다닐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의 헤어짐은 언제나 힘든 일. 동료들에게 꽃다발과 선물을 받던 순간에도 애써 담담한 척 잘 참았는데 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퇴사 전까지 2주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러 오신 친정 엄마가 큰 꽃바구니를 건네며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우리 딸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 수고했어!” 평생을 정말 열심히 살아온 엄마에게 그 말을 들으니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나는 퇴사했다. 내 삶에서 몇 개 정도는 될 챕터에서 한 챕터를 끝낸 느낌이다. 그래서 꼭 글로 남기고 싶었다. 이 글은 그 챕터의 첫 장이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8년의 구구절절한 ‘반반’ 시절로 거슬러 가기도 하고,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 못지않은 ‘두 번의 출산기’도 있을 예정이다. 치열했고 강렬했던 내 삶을 기록하다 보면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퇴사기의 첫 페이지를 갈무리해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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