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생애 처음으로' 버스킹을 했다. 흔히 버스킹 하면 생각나는 '노래'는 아니었다. 음치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대놓고 보여줄 정도는 아님을 너무 잘 안다. 그래도 명목상 버스킹 장소 신청서를 제출할 때 분류가 있어야 하기에 <토크 버스킹>이라 이름 붙였다.
특별한 준비는 하지 않았다. 테이블 용 캐리어, 이야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제공할 목욕탕 의자 2개, 이렇게 한다는 걸 안내하기 위한 화이트보드, 버스킹이 괜찮으면 무엇을 담아달라는 팁박스, 기타 등등이었다.
(버스킹은 상업용으로 진행할 수 없다.)
버스킹에도 절차가 필요하다.
다이소에서 구매한 제품들
지하철 탈 때 잡상인을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빛들
해운대는 버스킹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
저녁 8시 해운대 해수욕장 퍼포먼스존 2에서 준비한 물건들을 바닥에 놓고 사람을 기다렸다. 해운대 해수욕장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이크와 앰프가 아닌, 캐리커쳐가 아닌, 해나가 아닌, 자화상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회사를 안 다녀도 행복하고 싶다면?’이란 글자가 적힌 화이트 보드만 덜렁 놔둔 나에게 많은 사람이 눈길을 줬다. 정확히는 나보다 내 옆에 있는 내 친구에게 눈길을 줬다. 내 친구는 타로를 준비했다. 사실 나 같아도 거기에 눈길이 갔을 테다.
회사를 안 다녀도 행복하고 싶다면?
(-)
1. 돈을 잃었다.
준비물로 1인 2만 원을 썼다. 그러나 팁 박스에 담긴 돈은 4천 원이었다. 참고로 나와 내 친구는 하나의 팁 박스를 썼고, 둘이 합쳐 30여 명과 대화를 나누었다. ‘고작’ 1만 6천 원이지만 마이너스였다. 왕복 교통비와 두 시간의 최저 시급을 따지면 3만 5천 원을 잃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둘 다 돈을 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2. 기분을 잃었다.
사실 특별히 무엇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기존 강연에서 하던 이야기들을 마주 앉은 1~2명에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충분히 ‘문제없을’ 거로 생각했다. 쉽게 말해 자만했다.
그러나 ‘화려한’ 타로를 무기로 둔 친구 앞에 나는 부족하고도 부족한 사람이었고, 사람들은 내게 눈길만 줄 뿐 발길을 돌리지는 않았다. 나는 네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즉, 대부분은 친구에게 발길을 건넸다.
대화의 기술을 연습하고자 했던 목적이 있던 친구가 제안한 버스킹이었다. 그래서 귀한 시간 내어 나를 보러 와준 내 지인들도 모두 친구에게 보내었다. 친구가 여러모로 만족했으니 나도 좋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준비 안 한 나를 탓할 수밖에 없다.
(+)
1. 배웠다.
버스킹은 언제나 청자의 입장이었으나 처음으로 화자의 입장이 되었다. 모든 현상은 위치에 따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화자가 되어 보니 여름밤에 마실 나온 사람들이 어떤 자리에 관심을 두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먼저, 사람들은 무거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여름 밤바다에서는. 누군가는 바다를 보며 걱정을 내려놓으려 하지만, 대부분은 아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데이트하듯 나오는 거다. 그런 자리에서 무거운 무언가를 얻어가고 싶어 하지는 않는 듯했다.
음악 하는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실제로 노래 버스킹을 오래 하는 사람들은 선곡도 선별해서 가져온다. 어떤 노래가 낮과 밤에 어울리는지 파악하여,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모이게 만든다. 그에 대한 보답은 두둑한 팁박스 일수도 있고, SNS 팔로우가 늘어날 수도 있다.
나는 너무 무거운 주제를 잡았다. 친구와 협의 끝에 내려진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한 문장이라 생각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행복이라니...
나와 이야기한 분들과 주제와 관련하여 진중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다. 분명 나에게는 값진 시간이었고, 그들도 그랬기를 바란다.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과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는 조금은 가볍게 다가가야 했다.
내가 버스킹을 한 목적은 세 가지였다.
한 가지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런 거 하는 거지”라는 친구의 말에 혹했다. 다른 한 가지는 나를 모르는 완벽한 불특정 다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마지막 한 가지는 SNS 팔로우가 한 명이라도 늘었으면 하는 거였다. 처음부터 돈은 바라지도 않았다.
첫 번째 목적은 대성공이었다. 두 번째는 반 성공이었다. 조금 더 많은 사람과 이야기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세 번째는 완전 실패였다. 2시간 동안 10명 정도가 늘긴 했으나, 계정을 봤을 때 버스킹을 보고 맺은 사람은 아니었다.
2. 동기부여를 느꼈다.
요즘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고, 강연을 할수록 스스로 많이 부족하고 배움이 필요함을 느낀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이 이토록 와 닿은 적은 없었다. 겸손함과 더불어 조금 더 나아져야겠다는 동기부여를 버스킹 하며 받았다. 정말 뜬금없을 정도로 무언가를 깨달은 시간이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3. 글의 재료를 얻었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외국에서 식당에 가면 메뉴를 제대로 안 보고 음식을 시킨다고 한다. 맛있으면 맛있어서 좋고, 맛없으면 글의 재료로 쓸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버스킹도 그랬다. 앞서 세 가지 목적이 있다고 했지만, 글의 재료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적이라 말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더 많은 재료를 얻었다. 재료를 어떻게 손질할지는 내 손에 달렸지만, 마이너스 3만 5천 원 이상의 재료임에는 틀림없다.
(이미 지금 이 글의 재료가 되었지만)
4. 일단 했다.
저는 그저 주는 사람입니다. 행동하는 사람은 지금 듣고 계신 여러분입니다.
강연의 열에 여덟은 이와 비슷한 말로 마무리한다. 그만큼 행동이 중요하지만,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이다.
일단 나는 했다. 사실,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을 때 비가 내려 ‘강제로’ 버스킹이 취소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뭔가 부끄러울 것만 같았다. 그러나 비는커녕 버스킹 하기 너무 좋은 날씨였다. 처음 20분은 뭔가 얼굴이 붉어졌는데, 나중에는 주변 음악을 감상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내 친구에게 몰린 덕분에 생긴 여유이기는 했다.
그러나 했다. 누군가 토크 버스킹을 한다고 하면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거라 이야기해줄 수 있을 테고,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더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날 밤
행동해야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어려운 이유는 해야 하는 이유보다 안 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고 있기 때문이다.해야 할 이유가 1~2가지라면 안 해야 할 이유는 100가지가 넘는다.
누군가 버스킹이든 토크 버스킹이든 준비하고 있다면 얼른 자리를 알아보고, 그날의 날씨를 봤으면 한다. 그리고 나가면 된다. 나처럼 부끄럽게 시작할지라도 더 많은 것을 가져올 수 있음을 확신한다. 다행히도 아직은 그럴 수 있을 나이임에 감사하고 감사한다.
참고로 머뭇거리면 원하는 날짜와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없다. 요즘 버스킹도 여러 클레임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관에서 관리한다. 다행이자 아싑게도 기회와 리스크는 언제나 동반한다.
ps. 행동의 법칙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YC College 문영호 대표님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